“두 영화는 신기하게 안타고니스트를 활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묘하게 닮았다. 보통 주인공의 극적 갈등과 멋진 해결을 도드라지게 보여주기 위해 거의 모든 극에 안타고니스트를 내세우기 마련인데 두 작품 모두 이 전략을 과감히 생략한 것이다. ‘드라마틱’을 위해 다소 전형적이고 MSG인 줄 알지만 첨가할 수밖에 없었던 악역을 레시피에서 과감히 뺀 세련된 용감함으로 볼 수 있다.”
(기사 본문 중)
당시 이 글을 읽고 많이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왜 그랬는지 오늘 신스텔러를 통해서 풀어 보죠.
'안타고니스트 Antagonist'에 대한 오해를 풀자.
고대 그리스어 ἀντί (anti, "대항하여") + ἀγωνιστής (agōnistēs, "전투자")
> ἀνταγωνίζεσθαι ("대항하다")
> ἀνταγωνιστής ("상대자")
> 라틴어 antagonista
(출처 : 위키낱말사전) 그리스어 쓸 줄 몰라요.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유명한 가수의 유명한 노래죠. 잔뜩 힘 뺀 목소리로 ‘난 너고 넌 나야~ 넌 나고 난 너야~’ 이렇게 선언하며(?) 시작하는 노래. 우습게도 이 노래를 듣고 주인공과 악당의 관계를 가장 먼저 떠올렸습니다. 슬픈 일이죠.
어찌 보면 주인공과 악당의 관계는 꽤나 로맨틱합니다.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오기도 합니다. ‘You complete me’ 조커가 배트맨에게 하는 대사죠. 사실 이 대사는 이보다 더 오래전에 나온 영화 <제리 맥과이어>에서 주인공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달려가 고백하는 장면에서 먼저 나왔습니다.
목소리마저 젊은 톰 크루즈
<제리 맥과이어>에서의 이 대사는 로맨틱하지만, <다크 나이트>에서는 무척 섬뜩하게 느껴집니다. 조커의 얼굴이 무섭기 때문만은 아닐 거예요. 상황을 한 번 볼까요.
(주의 : 이미지를 클릭하면 매우 깜짝 놀랄 수 있습니다)
#취조실
고든 경감이 나가고 불이 꺼지면, 조커 뒤로 배트맨이 보인다.
배트맨이 조커의 머리를 책상에 내리찍는다.
조커 머리부터 때리지 마. 멍해지면 고통 못 느껴.
배트맨, 조커의 손등을 주먹으로 내리친다.
조커, 전혀 아파보이지 않는다.
조커 봤지?
배트맨 날 원했지? 여기 있다.
조커 어떡할지 궁금했는데 실망 안시키더군 5명이나 죽게 놔뒀어. 그리고 하비한테 짐을 지웠지. 좀 심했다고 봐
배트맨 하비 어딨어?
조커 갱들은 네 놈만 없으면 지들 세상인 줄 아는데, 어림없는 소리. 네가 모든 걸 바꿔놨어. 영원히.
배트맨 그럼 왜 날 죽이려 하지?
조커 (웃으며) 누가 죽인대? 너 없이 누구랑 놀아? 어줍잖은 갱 놈들? 아니 싫어! '넌 나를 완성시켜 (You complete me)'
배트맨 넌 인간 쓰레기야
조커 경찰처럼 굴지 마. 넌 저들하곤 달라. 저들한테 넌 그저 나같은 별종일 뿐이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영화 <다크 나이트>의 취조실 장면 중 일부입니다. 앞서 언급한 대사 ‘You complete me’가 나오는 맥락을 확인할 수 있죠. 저는 이 여기가 주인공과 악당의 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훌륭한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단 <다크 나이트>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이야기에 적용된다고 생각해요.
난 너고 넌 나야
간단하게 복습을 해 볼까요. 지난 시간에 [방해하는 세력]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악당은 방해하는 세력 전체를 대변하지 않으며, 주인공을 방해하는 세력은 악당뿐 아니라 가난이나 화성 같은 존재도 포함된다는 내용이었죠.
보통은 한 작품에서 두 유형의 갈등이 동시에 드러나죠. 이 중에서 [나 vs 남] 갈등을 만드는 존재가 바로 빌런입니다. 빌런은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히어로를 방해하기도 하지만, 히어로와의 신뢰 관계를 이용하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자신의 챔피언을 내세워서 방해하기도 하죠. 또한 히어로가 [나 vs 나]의 갈등 상황에서 고통스러워할 때, 그것을 조장하거나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또한 빌런은 히어로에게 종속적인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나눠지기도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1) 빌런의 욕망이 히어로를 향하는 경우 경우 (ex : <아이언맨 2> 이반 반코)와, 2) 빌런이 자기 욕망을 실현하는 데에 히어로가 방해가 되는 경우 (ex :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저> 레드 스컬)로 나눌 수 있는 것이죠. 1)의 경우에서는 히어로가 어그로를 끌어서 빌런을 부르는 반면, 2)의 경우는 빌런이 어그로를 끌어서 히어로를 부르게 되죠.
오늘은 전 세계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한 히어로들의 이야기,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등장하는 빌런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2008년 영화 <아이언맨>을 시작으로 2018년<앤트맨과 와스프>에 이르기까지 10년간 20편의 영화가 나왔죠. 대중적으로 성공한 히어로 서사에서 빌런은 어떤 역할들을 했을까요? 빌런은 어떤 욕망을 가지고, 어떤 행동을 하며, 어떤 방식으로 히어로를 괴롭힐까요?
1. 아이언맨
주인공은 토니 스타크(=아이언맨)이고, 빌런은 토니의 아빠인 하워드의 친구이자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공동 창업자(?)인 ‘오베디아 스탠(=아이언 몽거)’입니다. 그는 돈을 욕망하는 사람이며, 돈을 벌기 위해서는 테러리스트나 반군에게도 무기를 판매하는 사람이죠. 그런 그의 행동을 방해하는 사람이 토니 스타크입니다. 오베디아는 방해꾼인 토니를 제거하기 위해 1) 신뢰 관계를 이용하여 2) 아크 리액터를 탈취하고 3) 아이언 몽거 슈트를 입습니다. 더 강한 힘으로 아이언맨을 제압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사망하네요.
아이언맨의 빌런, 오베디아 스탠(아이언 몽거)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빌런 분석 VOL.1 : <아이언맨>에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까지
VOL.1에서 등장한 빌런들을 살펴보면, 로키를 제외하고는 성장하는 빌런이 없다고 볼 수 있겠죠. 빌런을 성장시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슈퍼 히어로 서사에서 최우선으로 성장해야 할 캐릭터는 바로 히어로이고, 히어로는 빌런으로부터 적극적인 방해를 받으면서 성장하기 때문이죠. 빌런의 성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빌런은 히어로의 적극적인 방해를 통해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니 한 작품에서 히어로와 빌런이 동시에 성장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MCU 페이즈 3부터는 성장하는 빌런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대표적으로는 <앤트맨과 와스프>의 빌런 ‘고스트’가 있겠네요. <스파이더맨 : 홈 커밍>의 ‘벌처’도 성장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빌런이라 부르기는 어렵지만,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에서 처음 등장하는 ‘블랙 팬서' 역시 빌런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성장합니다. 빌런의 성장은 과거 일본에서 유행했던 ‘전대물(=파워레인저)’의 이야기 구조와 유사한데요, 주인공과의 전투를 통해 회심(?)하여 동료가 되는 방식입니다. 만화 <원피스>의 밀집모자 해적단도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 전에 서로 피 터지게 싸우곤 했죠. (역시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니까)
오늘 다룰 빌런들은 VOL.1의 악당들보다 더 복잡하고, 입체적이며, 그래서 더 매력적인 녀석들입니다. 오늘의 질문도 이전과 같습니다. 대중적으로 성공한 히어로 서사에서 빌런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어떤 욕망을 가지고, 어떤 행동을 하며, 어떻게 주인공을 괴롭힐까요?
11. 어벤저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
주인공은 어벤저스 군단이고, 빌런은 울트론입니다. 울트론은 토니 스타크와 브루스 배너가 만든 인공지능 로봇입니다. 물론 토니와 배너는 이 녀석이 빌런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죠. 울트론의 욕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토니와 배너의 욕망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아마도 첫 장면일 것입니다. 어벤저스 군단이 하이드라 기지를 습격하여 치타우리 셉터를 되찾는 장면이지요. 이 과정에서 하이드라가 만든 초능력자 완다를 만나는데요, 엄청 센 초능력과 함께 정신지배(?)의 능력까지 갖춘 완다는 어벤저스 멤버들에게 각기 다른 환각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토니 스타크는 그 환각 속에서 외계 군대가 지구를 멸망시키는 장면을 보게 되죠. 토니는 이 환각이 현실로 다가올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개발 중이던 울트론 프로그램에 치타우리 셉터의 힘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울트론이 탄생하죠.
울트론은 지구를 지키기는커녕, 우주의 평화를 위해서는 지구가 멸망해야 한다고 판단합니다. 그가 가진 초월적인 네트워크 능력으로 인류의 역사를 전부 뒤져본 결과가 그랬죠. (이와 비슷한 장면이 아주 오래된 sf 영화에도 나오는데요, 뤽 베송 감독의 <제5원소>입니다. 밀라 요보비치가 지구를 구할 제5 원소인데 인터넷에 접속해서 인류의 역사를 찾아보고는 무척 고통스러워하죠… ‘과연 지구는 구할 가치가 있는가?’ 클리셰라고 할까요) 아무튼 울트론은 이제 지구를 파괴해야 하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 새 몸도 바꾸고 소코비아를 하늘로 띄우는 등 별별 짓거리를 다 합니다. 물론 어벤저스 군단(특히 비전과 완다)에 의해 좌절되구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빌런 분석 VOL.2 : <어벤저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앤트맨과 와스프>까지
주인공은 욕망을 가지고 반드시 행동해야 하는 저주에 걸리게 됩니다. 이 순간을 이야기의 [시작]이라고 불렀어요. 이야기가 [시작]하기 위한 필수적이면서도 최소한의 정보를 제공하는 단계가 [처음]이고요.
작가는 [처음]을 만드는 동안 이야기 세계의 창조주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이 누구이며, 어떤 욕망을 가지며, 어떤 (첫 번째) 행동을 할 수 있을지 정할 수 있어요. 나아가 주인공이 속한 세계가 어떤 세계이며, 어떤 규칙을 가지고 움직이는지 정할 수 있겠죠. 이 작업을 하는 동안 작가는 신(God)과 다름없는 존재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주인공이 저주에 걸리고, 균형 상태가 무너지고, 첫 행동을 하기 [시작]하면 작가는 더 이상 이 세계를 마음대로 변화시킬 수 없어요. 이제 주인공은 자기 욕망에 따라 움직일 것이고, 방해하는 세력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지요. 세계의 규칙은 이미 [처음]에서 정해졌고, 작가 역시 스스로 정한 규칙에 따라 인물들을 움직여야 해요. 그러니까 [처음]에서 작가의 역할은 사실 신(God)이 아니라 이 ‘규칙을 정하는 사람(rule maker)에 가까운 것이죠.
이야기의 논리 = 행동의 논리
이제부터 이야기는 ‘논리'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해요. 이야기를 소비하는 사람들(이 글에서는 ‘독자'라고 지칭할게요)이 논리에 따라 이야기를 소비하기 때문이죠. 독자들은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구성된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어요. 자신이 이해한 작품 속 세계의 규칙에 따라, 설정된 주인공의 성격이나 욕망에 따라 이야기가 합리적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죠. 작가는 독자의 기대를 무시해서는 안 돼요. 무시당한 독자는 분명 화를 낼 테니까요.
그렇다면 이야기의 논리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 복잡한 녀석을 최대한 단순하게 이해하기 위해 ‘행동'이라는 녀석을 조금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는 행동은 굳이 영어로 번역하자면 [act]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act]를 [do]하고 구분할 필요가 있는데요, 편의를 위해 (조금 게으르지만) 아래와 같이 구분해 볼게요.
행동 = act = 행위에 목적이 추가된 상태
행위 = do = 목적 없이 행위만 존재하는 상태
갓난아이를 떠올려 볼게요. 아직 말을 하지 못하는 갓난아이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행동이 매우 제한적입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아이들은 웁니다. 배가 고프면(자극) 밥을 달라고(욕망) 울고(행동), 똥을 쌌으면(자극) 기저귀를 갈아달라고(욕망) 울고(행동), 몸이 아프면(자극) 어떻게든 해달라고(욕망) 웁니다(행동). 모든 욕망이 ‘운다'라는 행동으로 연결되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가 우는 아기의 기저귀를 확인하거나 젖병을 물리거나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확인하는 것은, 아기의 행동은 있으나 그 욕망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기는 자신의 욕망을 사회화된 언어, 즉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울기)을 하는 것이죠.
자, 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사는 인물의 말이고, 말은 인물의 행동입니다. 행동에는 그 행동을 수행하는 인물의 욕망이 담겨 있습니다. 결국 대사에는 그 대사를 내뱉은 인물의 욕망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배고파"
라는 말을 어떤 인물이 했다고 칩시다. 인물은 실제로 배가 고파서 저런 말을 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가능성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실제로 배가 고프지 않더라도, “배고파" 라는 말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1) 지루한 대화 주제를 돌리기 위해서, 2) 혹은 (자신은 아니지만) 배가 고플 것 같은 상대를 배려하기 위해서도 “배고파"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3) 스트레스 상황에서 습관적으로 “배고파"를 내뱉곤 하는 인물일 수도 있죠. 이러한 경우 “배고파"라는 말은 실제로 ‘배가 고프니 뭘 좀 먹자’의 의미가 아니라 1) 그 얘기는 좀 그만 해, 2) 배고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너를 위해 내가 먼저 말해 줄게, 3) 나는 지금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 의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지난 [신스텔러 3회] 저주받은 주인공들 : 균형 상태와 균형 상태의 파괴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었죠. 이야기는 [처음] 단계를 지나 [시작] 단계에서 시동을 겁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행동하기 시작하고, 이를 방해하는 세력들이 등장하여 갈등 구도가 형성됩니다. 이 지점을 저는 [시작]이라고 불렀어요.
그리고 [시작]에서 독자(관객)들은 하나의 질문을 떠올립니다. ‘과연 주인공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요. 이것을 궁금해하기 시작하면 이야기를 끝까지 소비할 수밖에 없습니다. 독자(관객)을 이야기 속에 붙들어 두게 하는 힘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