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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야기의 논리 : 작가는 신(God)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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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사건
행동
원인
결과
흔히들 픽션의 작가를 신(God)에 비유하는 문장을 보곤 합니다. 작품이 하나의 세계라면, 작가를 그 세계의 창조주로 보는 시각들이죠. 하지만 저는 이 비유를 무척 경계하는 편입니다. 작품을 하나의 세계로 비유하는 데에는 100% 동의할 수 있지만, 작가가 그 세계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신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세계가 신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인정하더라도, 그 세계가 신의 권위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계는 그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들의 행동으로 인해 움직입니다.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작가가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 때, 어느 시점까지는 신과 같은 권위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 시점은 이야기가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신스텔러 3회] 저주받은 주인공들 : 균형 상태와 균형 상태의 파괴에서 잠시 언급한 적이 있었죠.
주인공은 욕망을 가지고 반드시 행동해야 하는 저주에 걸리게 됩니다. 이 순간을 이야기의 [시작]이라고 불렀어요. 이야기가 [시작]하기 위한 필수적이면서도 최소한의 정보를 제공하는 단계가 [처음]이고요.
작가는 [처음]을 만드는 동안 이야기 세계의 창조주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이 누구이며, 어떤 욕망을 가지며, 어떤 (첫 번째) 행동을 할 수 있을지 정할 수 있어요. 나아가 주인공이 속한 세계가 어떤 세계이며, 어떤 규칙을 가지고 움직이는지 정할 수 있겠죠. 이 작업을 하는 동안 작가는 신(God)과 다름없는 존재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주인공이 저주에 걸리고, 균형 상태가 무너지고, 첫 행동을 하기 [시작]하면 작가는 더 이상 이 세계를 마음대로 변화시킬 수 없어요. 이제 주인공은 자기 욕망에 따라 움직일 것이고, 방해하는 세력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지요. 세계의 규칙은 이미 [처음]에서 정해졌고, 작가 역시 스스로 정한 규칙에 따라 인물들을 움직여야 해요. 그러니까 [처음]에서 작가의 역할은 사실 신(God)이 아니라 이 ‘규칙을 정하는 사람(rule maker)에 가까운 것이죠. ​

이야기의 논리 = 행동의 논리

이제부터 이야기는 ‘논리'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해요. 이야기를 소비하는 사람들(이 글에서는 ‘독자'라고 지칭할게요)이 논리에 따라 이야기를 소비하기 때문이죠. 독자들은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구성된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어요. 자신이 이해한 작품 속 세계의 규칙에 따라, 설정된 주인공의 성격이나 욕망에 따라 이야기가 합리적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죠. 작가는 독자의 기대를 무시해서는 안 돼요. 무시당한 독자는 분명 화를 낼 테니까요.​
그렇다면 이야기의 논리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 복잡한 녀석을 최대한 단순하게 이해하기 위해 ‘행동'이라는 녀석을 조금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는 행동은 굳이 영어로 번역하자면 [act]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act]를 [do]하고 구분할 필요가 있는데요, 편의를 위해 (조금 게으르지만) 아래와 같이 구분해 볼게요.
행동 = act = 행위에 목적이 추가된 상태 행위 = do = 목적 없이 행위만 존재하는 상태
그러니까, ‘김신이 키보드를 두드린다'라는 문장에서는 행위[do]만 보인다고 할 수 있어요. 키보드를 두드리긴 두드리는데, 왜 두드리는지는 드러나지 않고 있으니까요. 화가 나서 두드리는지, 리듬을 맞추기 위해 두드리는지, 불안함을 감추기 위해 두드리는지 알 수가 없죠. 그런데 ‘김신이 신스텔러 원고를 작성하기 위해 키보드를 두드린다'라는 문장에서는 행위[do]의 목적이 드러나고 있어요. 이 문장에서의 김신은 두 손을 키보드에 올린 채 열 손가락을 모두 이용하여 키보드의 자판을 두드리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행동[act]은 두 개의 단위로 이루어져 있어요. 김신은(주어) 신스텔러 원고를 작성하기 위해(단위 1), 키보드를 두드린다(단위 2). 행동의 두 단위는 ‘그래서'라는 접속사로 연결되어 있어요. 이것이 바로 행동의 원리에요. <희곡의 통쾌한 분석>의 저자 데이비드 볼 선생은, 행동의 두 단위를 ‘trigger(방아쇠)와 heap(시체더미)’로 비유했어요. 방아쇠를 당기면 시체더미가 생긴다는 의미에서 나온 비유인 것 같은데…(백발백중!) 뭐 아무튼,
trigger는 원인이고, heap은 결과에요. 우린 이런 걸 원인과 결과의 관계, 즉 인과관계라 부르고, 인과관계를 자연스럽게 엮어주는 접속사는 ‘그래서'에요. 그러니까 행동의 논리는 그래서의 논리이고, 이야기의 논리 역시 그래서의 논리에요. 원인과 결과가 만나 행동이 되고, 행동이 모이면 사건이 되고, 사건이 모이면 이야기가 되니까요.

이야기는 하나의 거대한 도미노와 같다

재미있는 점은, 행동과 행동이 서로 절반씩 겹쳐서 존재한다는 점이에요. 예를 들어 행동 a는 원인 a와 결과 a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 볼게요. [원인 a + 결과 a = 행동 a]가 성립하겠죠. 그런데 그다음에 행동 b가 온다고 생각해 보세요. 행동 a에서의 결과 a는 행동 b의 원인 b가 되는 거예요. 제가 쓰면서도 복잡하니까 그림으로 그려 볼게요.
그래서 이야기는 하나의 거대한 도미노와 같아요. 첫 번째 조각이 쓰러지면서 뒤의 조각을 쓰러뜨려요. 뒤의 조각이 쓰러지면서 그 뒤의 조각을 쓰러뜨리고, 그 조각이 또 뒤의 조각을 쓰러뜨리고…(언제까지 쓸 거야) 이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마지막 조각이 쓰러지고 이야기가 끝나게 되는 거예요. 만약 하나의 조각이라도 제대로 쓰러지지 않으면 그 뒤의 조각들은 절대 쓰러지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된다면 이야기가 완성되었다고 볼 수 없겠죠.
그러니 조심하세요. 도미노를 구성하는 모든 조각들은 하나의 행동과 같아요. 원인이 되었다가 결과가 되고, 다시 원인이 되기를 반복하죠. 이러한 인과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이야기 전체에 문제가 생겨요. 덜 쓰러진 도미노와 같은 이야기가 되어버리죠. 이를 이야기의 논리적 결함이라 부를 수 있고, 독자들은 이 결함을 기가 막히게 잘 찾아내요. 아무리 둔한 독자라도 말이죠.

첫 번째 도미노를 쓰러뜨리는 우연

자, 이제 다시 작가가 신(God)의 역할을 하던 시점으로 되돌아올게요. 이야기의 [처음] 단계에서 작가는 도미노의 모든 조각을 세워놓는 일을 해요. 그리고 이야기의 [시작] 단계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첫 번째 도미노 조각을 쓰러뜨리는 거예요. 그야말로 신(God)의 권위죠!
픽사의 전 스토리보드 아티스트인 엠마 코트는 그가 동료들에게서 배운 스토리텔링 법칙 22가지를 정리해서 자기 블로그에 올렸다고 해요. 22가지 법칙 모두에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그중에서 제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법칙 하나를 인용할게요.
#19 : 캐릭터를 사건에 휘말리게 하는 우연은 훌륭하다. 캐릭터를 사건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우연은 사기다. #19: Coincidences to get characters into trouble are great. coincidences to get them out of it are cheating.
원문: http://storyshots.tumblr.com/post/25032057278/22-storybasics-ive-picked-up-in-my-time-at-pixar 한글 번역 : https://rayspace.tistory.com/548
자, 엠마 코트 선생이 말한 ‘캐릭터를 사건에 휘말리게 하는 우연'은 곧 ‘첫 번째 도미노 조각을 쓰러뜨리는 우연’과 같아요. 신의 권능을 가진 작가의 개입이 필요하죠.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아니에요. 도미노 조각들은 이제 스스로 원인과 결과의 역할을 반복하며 쓰러질 거예요. 그러니 더 이상 작가가 개입할 여지는 없어요. 첫 번째 도미노 조각을 쓰러뜨리는 기적을 행한 작가는, 이제 신의 권능을 겸허히 내려놓고 인간의 자리로 돌아와야 해요. 도미노에 손대지 마세요. 행동의 논리, ‘그래서’의 논리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그냥 두세요. 이야기의 도미노 조각이 제대로 쓰러지지 않으면, 뭐 별 수 있나요. 방망이 깎는 노인의 심정으로 도미노 조각들을 다시 세우는 수밖에요.
다음 이야기
Shin이 소개하는 좋은 이야기 구약 성서 호메로스, 일리아드, 오디세이아
글. Shin(김신) "스토리텔링은 픽사, 피자는 도미노 피자."
편집. Sol(고은비) "그래서, 오늘 저녁은 도미노 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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