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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주인공들 : 균형 상태와 균형 상태의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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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욕망

저주받은 주인공들

이번 글에서 자주 나타날 ‘저주'라는 단어는 은유적 표현임을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주인공이란 무엇일까요? 여러분들은 주인공을 정의할 수 있나요? 이야기에서 주인공을 찾아내는 일은 어렵지 않지만, 그렇다고 ‘주인공이란 마땅히 이러이러한 존재다’라고 정의하는 일은 생각보다 골치아픈 문제입니다. 주인공은 외모나 직업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소위 말하는 ‘스펙'이라는 것은 주인공을 만드는 데에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주인공을 주인공답게 만드는 것은 결국 그가 하는 행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인공은 반드시 행동해야 합니다. 행동하는 주인공을 만들기 위해 작가는 ‘주인공이 행동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야 하죠. 그리고 저는 작가의 그러한 행동을 ‘저주'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작가는 이야기 세계의 신이 되어 주인공에게 저주를 내려야 합니다. 저주받은 사람은 그 저주를 풀어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해야 하겠죠.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딱 그렇습니다.
저주를 대하는 방식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1) 저주를 풀어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한다. 2) 저주에 굴복하고 순응한다.
그러나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2번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2번을 선택한다 하더라도, 이야기의 결말에 이르러서야 가능합니다. 우리가 주인공에게 저주를 내리는 이유를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든 행동하게 만들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야기의 끝에서 주인공이 저주에 굴복하고 순응하게 만들더라도, 일단 이야기를 시작함에 있어서는 그 저주를 풀어내기 위해 노력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몇 가지 이야기를 예시로 들어 주인공들이 어떻게 저주에 걸리는지 알아보도록 하죠.

오이디푸스의 저주

자, 고대 그리스의 신탁(이라 쓰고 저주라 부른다) 대환장 파티인 <오이디푸스 왕>의 주인공은 오이디푸스입니다. 오이디푸스는 코린토스에서 왕자로 성장했습니다. 코린토스의 왕 폴리보스를 자신의 아버지로 알고 있죠. 그러던 어느 날, 델포이 신전에서 신탁을 하나 받습니다.
“너는 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할 것이다"
<신과함께2 : 인과 연>의 쿠키영상보다 충격적인 소식에 오이디푸스는 코린토스를 떠나 방랑의 길로 접어듭니다. 신탁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였죠.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신들의 큰그림이었으니… (실로 어마무시한 저주의 시작이 되시겠습니다)
일단 여기까지만 보겠습니다. 오이디푸스는 코린토스에서 꽤 잘 지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고, 어릴 때부터 다리가 아파 절뚝거리긴 했지만(떡밥1 : 오이디푸스는 ‘퉁퉁 부은 발’이라는 뜻이다), 그래도 왕자로써 잘 자라주었죠. 그런 그에게 신탁이라는 이름의 저주가 걸립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할 것이라뇨. 이제 오이디푸스는 이 저주를 벗어나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합니다. 그의 일상은 무너지고, 안전한 코린토스를 떠나 방랑길에 올라야 하죠.
이후 진행될 모든 이야기는 오이디푸스가 신탁을 피해 코린토스를 떠났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어느날 테베에 도착하고, 삼거리에서 자신을 모욕한 구누가를 죽이고, 테베를 괴롭히던 스핑크스를 만나고, 스핑크스를 이불킥하게 만들어 자살하게 하고, 테베의 왕이 되고, 왕비를 아내로 맞고, 자신과 아버지가 받은 신탁이 모두 이루어졌음을 깨닫고, 자기 눈을 찌르고, 테베를 떠나는 것까지 모두 다요. (으으 끔찍해)

쿠도 신이치(a.k.a 명탐정 코난)의 저주

아오야마 고쇼의 <명탐정 코난> 초반부를 살펴보면, 주인공 쿠도 신이치가 저주에 걸리는 장면이 명확하게 나옵니다. 고등학생 탐정으로 유명세를 날리던 신이치는 놀이동산에서 수상한 현장을 지켜보다가 검은 조직에게 당합니다. 수상한 약물을 강제로 삼킨 신이치는 의식은 그대로인 채 몸만 어린 꼬마(초등학교 1학년 수준)로 변하게 되죠. 문자 그대로 저주에 걸린 셈입니다.
이제 신이치(=코난)은 원래의 자기 몸으로 돌아가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해야 합니다. 검은 조직을 쫒아야 하고, 수상한 약물의 정체에 대해서도 알아내야 하죠. <명탐정 코난>은 에피소드 중심의 미스테리 탐정물이지만, 이야기 전체를 꿰뚫는 주인공의 욕망은 그가 걸린 저주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여전히 완결되지 않은 만화이고, 이야기가 끝나기 위해서는 코난이 걸린 저주를 반드시 해결해야 하죠. 저주를 풀거나, 혹은 저주에 굴복하고 순응하거나.
개인적으로 <소년탐정 김전일>과 <명탐정 코난>의 가장 큰 차이점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년탐정 김전일>은 언제 이야기가 끝나도 이상하지 않지만, <명탐정 코난>은 그 저주를 풀어내야만 끝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김전일이 저주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김전일은 매 에피소드마다 소소한 저주에 걸리곤 해요. 주로 할아버지의 이름을 거는 장면에서 그렇죠. (할아버지의 이름이 저주인가…?)

오펜하이머의 저주

최근 브릿g에서 가장 뜨거운 단편소설인 이산화 작가의 <세상은 이렇게 끝난다>(주: 2019년 출간 된 이산화 작가의 단편집 <증명된 사실>에 수록되었습니다)의 주인공 오펜하이머의 저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명은 알 수 없지만 소설 속에서 ‘오펜하이머'라고 불리우는 고등학생 주인공이 나오는데요, 이 친구가 저주에 걸리는 과정을 한번 살펴보죠.
오펜하이머는 텔러가 호기심에 저질렀다는 ‘연못 폭파 사건’에 대해 의구심을 가집니다. 텔러는 그럴 애가 아니니까요. 저주는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학교 선생님들을 포함한 다른 이들은 텔러의 자백을 받아들이고 인정하지만, 오펜하이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죠. 똑똑함과 호기심이 저주를 불러오고, 오펜하이머는 반드시 이사건의 진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야기는 미스테리 추리물의 형태를 갖추어나가기 시작합니다. 오펜하이머는 사건 현장을 조사하고, 자신의 가설이 틀리지 않았음을 점차 확신하게 되고, 주인공의 이러한 행동은 이야기를 작가가 원하는 결말로 이끕니다.

돌이킬 수 없는 저주는 주인공을 행동하게 한다

오이디푸스와 쿠도 신이치, 그리고 오펜하이머는 모두 저주에 걸렸습니다. 주인공들의 삶은 저주에 걸리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타임 리프'가 활용되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은 되돌릴 수 있더라도, 저주를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미래에 벌어질 일을 알고 있으니까요. 과거로 돌아간 주인공의 삶은, 처음 과거에 살던 주인공의 삶과 완연히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타임 리프야말로 어쩌면 더욱 끔찍한 저주일지도 모르겠네요.
주인공은 후회하고, 반성하고, 고통받을겁니다. 일상이 무너진다는 것은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니까요. 상상해 보세요. 어느날 갑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는다면? 몸이 어린아이와 같이 작아진다면? 남들은 의심하지 않는 것을 의심하게 되었다면?
대부분의 이야기들에서 주인공은 저주에 걸립니다. 그래야 이야기를 출발시킬 수 있으니까요. 지난 시간에 언급한 이야기의 최소단위 [주인공 - 욕망 - 행동] 한 세트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인공이 행동해야 하니까요. 창작자는 주인공이 행동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아무 행동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창작자가 원하는 행동을 유발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저주를 이용하는 것은 창작자의 특권일지도 모르죠. 아주 잔혹한 흑마법사가 되세요!

균형 상태와 균형 상태의 파괴

데이비드 볼 선생의 <통쾌한 희곡의 분석>에는 [균형 상태]와 [균형 상태의 파괴]에 대해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균형 상태]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은, 실제 아무 사건도 벌어지지 않는다는 말과는 조금 다릅니다. 힘과 힘이 서로 팽팽하게 맞서고 있기 때문에 마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것 처럼 보일 뿐이죠. [균형 상태]라는 말에 힌트가 있겠네요. 균형은 아무 힘도 작용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서로 상반되는 두 힘이 정확한 정도로 작용하고 있을 때에 발생하니까요.
데이비드 볼 선생의 명쾌한 분석에 감히 제 개념을 덧붙이자면, [저주]는 [균형 상태]를 파괴합니다. 오이디푸스가 신탁의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이고, 고등학생 탐정 신이치가 놀이동산에서 수상한 알약을 먹고 아이처럼 작아지는 순간이며, 오펜하이머가 “텔러는 그럴 애가 아니었다"라고 말하는 순간입니다. 이 순간들이 [균형 상태의 파괴]가 이루어지는 순간이며, 동시에 주인공이 저주에 걸리는 순간입니다.
나아가 저는 [처음]과 [시작]이라는 개념을 애용합니다. 데이비드 볼 선생의 이론은 분석하는 입장에 가깝기 때문에, 창작하는 입장에서 조금 더 친숙한 용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은 말 그대로 처음입니다. 물리적으로 이야기의 맨 처음, 그러니까 소설이라면 첫 문장일 것이고 영상이라면 첫 장면일 것입니다. [시작]은 주인공이 저주에 걸리는 순간입니다. [균형 상태]가 파괴되는 순간입니다. 갈등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그렇다며 자연스럽게, [처음]에서 [시작]까지를 [균형 상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죠.
굳이 이렇게 개념을 미리 정의한 이유는, 이야기를 만들 때 창작자가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과 [시작]에서 말이죠.

[처음]

이야기가 [시작]하기 위한 필수적이면서도 최소한의 정보를 알려줘야 합니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시/공간적 배경을 설명해야 하고, 주인공을 비롯하여 앞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갈 인물들이 등장해야 합니다. 간단한 서술이나 묘사를 통해 해결할 수 있고, 작은 이야기를 통해 해결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야기 전체에서 [균형 상태]가 아직 파괴되어서는 안됩니다. 주인공이 저주에 걸려서도 안되겠죠.

[시작]

주인공이 저주에 걸려야 합니다. 그래서 행동해야 하죠. 주인공의 욕망과 행동이 드러나고, 이를 방해하는 세력들이 등장합니다. 방해하는 세력은 [갈등]을 창조하고, [갈등]은 독자로 하여금 아주 중요한 질문을 떠올리게 합니다.
“과연 주인공은 저주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야기 전체의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클라이막스] 이후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독자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야 합니다. 독자 역시 저주에 걸리는 셈이지요. 저는 이 저주를 ‘재미’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갈등]과 [방해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신이 될 수 있는 마지막 순간

이제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한 번 시작된 이야기는 좀처럼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창작자가 이야기 세계의 창조주 역할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여기에서 끝납니다. 이제 주인공은 처음과 시작에서 설정된 법칙에 따라 움직입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자연 법칙을 거스를 수 없는 것 처럼, 창작자도 처음과 시작에서 만들어진 법칙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이제 창작자는 신의 권위를 내려놓고 인간의 영역으로 돌아와야 할 시간입니다.
다음 이야기
참고자료 데이비드 볼, <통쾌한 희곡의 분석>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아오야마 고쇼, <명탐정 코난> 이산화, <세상은 이렇게 끝난다>
Shin이 소개하는 좋은 이야기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아오야마 고쇼, <명탐정 코난> 이산화, <세상은 이렇게 끝난다>
글. Shin(김신) "너무 섭섭해 마세요. 물은 신이 만들었다손 치더라도, 배수로와 수력 발전소는 인간이 만든 것들이니까요."
편집. May(김미루) "미안한 이야기지만, 코난은 평생 저주에 걸려있었으면 좋겠어요. 이야기가 끝나면 안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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