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earch
🔟

2️⃣ 대사 쓰기의 기술 : 텍스트와 서브텍스트

Tags
대사
서브텍스트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쓰다 보면 반드시 대사를 적어야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특히나 희곡과 시나리오는 대사와 지문만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사실상 대사를 이용해서 이야기를 전개해야 합니다. 소설은 마음만 먹으면 대사를 이용하지 않고도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생생한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서술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많은 창작자들이 대사 쓰기에 어려움을 겪거나, 반대로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이야기에서 대사는 오직 정보 전달을 위해서 쓰이는 것 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정서 전달만을 위해서 쓰인 것 처럼 보이는 대사들도 있죠.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대사 쓰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잘 쓰기만 한다면 그만큼 이야기를 매력적으로 만들어주는 것도 없기 때문이죠. 오죽하면 '명대사' 라는 말이 있겠어요.

대사는 가장 적극적인 행동 중 하나이다

좋은 대사를 쓰기 위해서는, 먼저 대사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대사는 곧 인물의 말이고, 말이란 인물이 할 수 있는 행동 중 하나입니다. 말을 못 하는 인물이 아닌 이상, 말은 그 인물의 가장 적극적인 행동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죠.
지난 [신스텔러 11회] 이야기의 논리 : 작가는 신(God)이 아니다 에서 인물의 행동에 대해 이야기한 적 있습니다. 인물의 행동은 두 단위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죠. 원인과 결과, 방아쇠와 시체더미라는 비유를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행동이란 인물이 욕망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하는 행위입니다.​
갓난아이를 떠올려 볼게요. 아직 말을 하지 못하는 갓난아이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행동이 매우 제한적입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아이들은 웁니다. 배가 고프면(자극) 밥을 달라고(욕망) 울고(행동), 똥을 쌌으면(자극) 기저귀를 갈아달라고(욕망) 울고(행동), 몸이 아프면(자극) 어떻게든 해달라고(욕망) 웁니다(행동). 모든 욕망이 ‘운다'라는 행동으로 연결되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가 우는 아기의 기저귀를 확인하거나 젖병을 물리거나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확인하는 것은, 아기의 행동은 있으나 그 욕망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기는 자신의 욕망을 사회화된 언어, 즉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울기)을 하는 것이죠​.
자, 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사는 인물의 말이고, 말은 인물의 행동입니다. 행동에는 그 행동을 수행하는 인물의 욕망이 담겨 있습니다. 결국 대사에는 그 대사를 내뱉은 인물의 욕망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배고파"

라는 말을 어떤 인물이 했다고 칩시다. 인물은 실제로 배가 고파서 저런 말을 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가능성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실제로 배가 고프지 않더라도, “배고파" 라는 말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1) 지루한 대화 주제를 돌리기 위해서, 2) 혹은 (자신은 아니지만) 배가 고플 것 같은 상대를 배려하기 위해서도 “배고파"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3) 스트레스 상황에서 습관적으로 “배고파"를 내뱉곤 하는 인물일 수도 있죠. 이러한 경우 “배고파"라는 말은 실제로 ‘배가 고프니 뭘 좀 먹자’의 의미가 아니라 1) 그 얘기는 좀 그만 해, 2) 배고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너를 위해 내가 먼저 말해 줄게, 3) 나는 지금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 의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텍스트text 와 서브텍스트sub-text

희곡 분석에서는 이를 두고 ‘텍스트’와 ‘서브텍스트’로 구분하여 설명하곤 합니다. “배고파" 라는 텍스트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여러 서브텍스트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죠. 희곡을 분석하는 입장에서는, 텍스트를 통해 서브텍스트를 발견하는 역량이 무척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배우가 되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희곡에 "배고파"라고 적혀 있습니다. 무대 위에서 이 대사를 어떻게 말할 건가요? 작게 중얼거릴까요? 크게 외칠까요? 책상을 내려치며 말할까요? 바닥에 주저앉으며 말할까요? 손을 떨면서 말할까요? 배우는 이 중 하나를 선택하여 무대 위에서의 행동을 완성해야 합니다. “배고파" 라는 텍스트 안에는 수많은 서브텍스트의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텍스트를 통해 서브텍스트를 발견하는 역량은 특히 배우나 연출가들에게 더욱 중요한 역량입니다. 이들은 텍스트 너머에 숨겨진 진실, 즉 서브텍스트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대화의 맥락을 고려하고, 인물의 습관이나 성격을 고려합니다. 그래야 무대 위에서 진실되게 표현할 수 있겠죠.
자, 우리는 배우가 아니라 창작자입니다. 배우들은 텍스트를 분석하는 입장에 놓여 있지만, 우리는 분석당할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입장입니다. 앞서 한 이야기들을 반대로 생각해 보면 쉽습니다. 배우들이 숨겨진 서브텍스트를 찾아내는 입장이라면, 우리는 텍스트 너머에 서브텍스트를 숨겨 두어야 하는 입장인 것이죠.
‘아 모르겠고, 보물찾기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귀찮은 짓을 왜 해?’ 라고 반문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쎄요, 그건 우리 이야기에 인간이 등장하기 때문 아닐까요. 우리는 우리의 욕망 그대로를 말에 담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게 가능한 사람이 몇 떠오르긴 합니다만, 여기서 굳이 언급하지는 않을게요.)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는 인간들은, 일상 생활에서 자기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말을 자주 하지 않습니다. 그랬다간 사회에서 도태되거나, 심하면 경찰에 잡혀갈수도 있어요.

대사 쓰기 훈련법 1 : 일상의 대화를 녹음해서 들어보기

제가 거짓말 하는 것 같다면, 한번 직접 해 보세요. 자신이 누군가와 나누는 대화를 전부 녹음하고, 그것을 그대로 글로 옮겨 적어 보는 거에요. 그리고 그것을 대화에 참여하지 않은 누군가에게 보여주세요. 과연 그 누군가는 여러분이 나눈 대화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아마 아닐 거에요. 대화에서 말이 차지하는 비중은 생각보다 높지 않아요. 바디 랭귀지라는 것도 있고, 말과 말 사이의 침묵도 있죠. 크거나 작게 말하고, 웃거나 정색을 하며 말해요. 이런걸 ‘비언어적 행동'이라고 한다는데요, ‘비언어적 행동’을 통해 서브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대화의 녹취록을 읽은 누군가는 서브텍스트 없이 텍스트만 읽은 셈이고, 당연히 그 대화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죠. 이야기에서 대사를 쓸 때에도 이 점을 반드시 고려야 합니다.
텍스트만으로 모든 정보와 정서를 전달하려 하면, 아주 납작한 대화 장면이 되어버려요. 1차원적이고, 깊이감이 없는 대사만 나오죠. 반대로 서브텍스트를 찾을 수 있는 단서 없이 텍스트만 제공한다면, 독자는 인물들이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지 알 방법이 없어요. 창작자인 여러분은 이 두가지 끔찍한 상황 사이에서 밸런스를 잘 유지하셔야 합니다. 이걸 훈련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여러분의 녹취록을 누군가가 이해할 수 있도록 재구성 해보는 거에요. 누군가가 서브텍스트를 찾을 수 있도록 단서를 넣어 다시 쓰는 것이죠. 소설에서의 한 장면을 쓰는 것과 비슷할 거에요. 이 내용을 누군가에게 보여줬을 때, 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다면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대사 쓰기 훈련법 2 : 희곡이나 시나리오를 직접 분석하기

1번에 비해 조금은 전통적인 방법이에요. 시나리오나 희곡을 직접 분석해 보는 것이죠. 분석의 기준은 일단 하나에요. 희곡에 쓰여진 텍스트를 바탕으로, 서브텍스트를 찾아 직접 적어보는 거에요. 간단하게 예를 들어 볼게요.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의 첫 장면은 이렇습니다.
www.bbc.co.uk/hamlet
버나도 게 누구냐? 프란시스코 아니, 버나도 국왕 만세! 프란시스코 버나도인가? 버나도 그렇다 프란시스코 정확히 시간 맞춰 왔군. 버나도 막 12시를 쳤어. 자, 프란시스코, 이제 자러 가게나.
공간은 덴마크의 엘시노어 왕궁이고, 버나도와 프란시스코는 야간 경계 근무를 수행하는 것 같습니다. 둘의 대화를 살펴보면, 버나도와 프란시스코가 경계 근무를 교대하고 있네요. 먼저 근무를 서고 있던 사람이 프란시스코이고, 교대를 하러 온 사람이 버나도입니다. 대화의 맥락을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부분이죠.
재미있는 것은, 버나도의 첫 대사입니다. “게 누구냐?” 하는 대사인데요,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경계 근무를 서고 있던 사람은 프란시스코인데, 왜 버나도가 저런 질문을 할까요? 버나도는 프란시스코와 보초 근무를 교대하러 왔습니다. 성벽에 있는 사람이 프란시스코인줄 알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 누구냐?” 하고 묻습니다. 이상하죠. 버나도의 “게 누구냐?”는 과연 프란시스코를 향해 한 말일까요?
이유는 조금 뒤에 가서 밝혀집니다. 지난 이틀 밤 동안, 버나도는 보초 근무를 서던 중에 유령을 목격했습니다. 그 유령은 죽은 선대 왕의 모습을 하고 있었죠. 그러니 <햄릿>의 첫 대사, “게 누구냐?”는 프란시스코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내뱉는 대사가 아닙니다. 근무 교대를 위해 성벽에 도착한 버나도가 인기척을 느꼈고, 그것이 지난 이틀 밤 동안 나타났던 유령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버나도를 연기하는 배우는 이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프란시스코를 향해 “게 누구냐?”를 당당히 외친다면 관객들은 혼란에 빠질 거에요. 아마도 버나도를 연기하는 배우는, 두려움과 함께 “게 누구냐?”라는 대사를 해야 할 겁니다.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오히려 큰 목소리를 낼 수도 있고,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낼 수 도 있겠죠. 그리고 프란시스코가 “아니, 내 말에 답하라. 서라, 누군지 밝혀라.” 했을 때 안심하는 모습을 보일 겁니다.
텍스트 게 누구냐? 서브텍스트 유령이라면 (지난 이틀 밤과 같이) 대답을 안할 것이고, 프란시스코라면 대답을 하겠지. 그러니 무섭지만 물어보자.
이런 식으로 희곡이나 시나리오의 서브텍스트를 분석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여러분들의 이야기에서도 좋은 대사를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처음엔 쉽지 않겠지만, 익숙해진다면 금방 할 수 있을 거에요.

대사 너머로 인물이 보이도록

대사 쓰기는 어쩌면 문장 쓰기보다 더욱 어려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자칫 잘못하면 인물의 입을 통해 창작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만을 구구절절 쏟아내게 됩니다. 반대로 인물의 정서만을 부담스럽게 토해내는 경우도 있죠. 하지만 대사가 해야 할 일은 그보다 더 많습니다.
대사는 인물이 할 수 있는 행동 중 하나입니다. 행동은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져 있고, 행동을 통해 인물의 욕망을 확인할 수 있죠. 그러니 대사는 인물을 이해하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만든 인물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얼마나 입체적인지,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 대사를 통해 보여주세요. 일상의 디테일을 놓치지 말고, 독자로 하여금 서브텍스트를 찾을 수 있는 힌트를 남기세요. 정말 좋은 대사는 한 줄의 명대사가 아니라, 그 한 마디 너머에 인물의 모습이 보이는 대사 아닐까요.
다음 이야기
글. Shin(김신) "왜 그 아저씨들이 많이 하는 말 있잖아요... ‘말이 곧 인격이다' (소오름)"
편집자. "이번 회차를 다 읽고 나니, 좋은 대사로 영화 <베테랑>에서 조태오가 친 대사가 딱 떠오르네요. '어이가 없네' "
안전가옥과 사전협의 없이 본 콘텐츠(글, 이미지)의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어길 시 민, 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