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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의 원리 : 네 가지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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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는 갈등을 다루는 방법 혹은 태도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요, 오늘은 갈등이 어떠한 양상으로 전개되는지 유형에 따라 살펴보려고 합니다. 갈등을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눈 것은 데이비드 볼 선생의 책 <희곡의 통쾌한 분석>을 참고했으며, 각 유형별 사례는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한국 장르판의 소설들을 다루려고 노력하였습니다.
1. 나 vs 나 2. 나 vs 남 3. 나 vs 사회 4. 나 vs 신

유형 1 : 나 vs 나

말 그대로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두 입장이 내 안에서 갈등하는 모습입니다. 나의 머리를 가운데 두고 싸우는 천사와 악마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겠습니다. 선한 행동을 하려는 나와 악한 행동을 하려는 내가 갈등할 수 있습니다. 양심에 따라 행동하려는 나와 편법을 행하여 이득을 취하려는 내가 갈등할 수 있겠죠. 짜장면을 먹으려는 나와 짬뽕을 먹으려는 내가 갈등할 수 있습니다. [나 vs 나]의 갈등은 굉장히 다양한 형태를 띄지만 매우 보편적으로 나타납니다.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만큼 공감할 수 있는 가능성도 크지요. 우리의 실제 삶에서 자주 나타나는 갈등의 형태니까요.

사례 : 임태운 <근방에 히어로가 너무 많사오니>

이 작품에서의 [나 vs 나] 갈등은 어느날 갑자기 생겨난 ‘레드링’으로 인해 세계 인구의 20%가 히어로인 세계를 (매우 흥미로운 장면들로) 설명한 직후에 등장합니다. 히어로의 특수능력을 삭제하는 ‘리무버’의 존재를 확신한 히어로들은 비극을 막기 위해 최대한 둘 이상의 히어로가 함께 행동하는 것을 권장하죠. 그러나 한창 인기와 능력이 성장 중인 마포구 ‘리얼맨’은 연합의 충고를 무시하고 홀로 행동합니다. 여기에서 [나 vs 나]의 갈등이 생겨나요.
리얼맨 역시 리무버의 존재가 두렵습니다. 다른 히어로와 함께 다닌다면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리얼맨은 히어로 랭킹의 순위가 낮아지는 것이 두렵습니다. 최근에는 별점 테러까지 당하고 있어 조금씩 랭킹이 하락하고 있죠. 리얼맨의 일상은 말래깽이 공익근무요원 박우람입니다. 어릴때부터 병약하여 잔병 치례가 잦았던 그에게 어느날 가공할 만한 힘이 생겨났고, 그 힘을 바탕으로 히어로 활동을 하고 있죠. 그는 자신이 무언가를 두려워한다는 사실 그 자체를 두려워할지도 모릅니다. 연약한 청년 박우람이 평생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눈치보며 살았다면, 리얼맨은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리얼맨은 리무버가 두려워도 두려워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없다고 생각해버리죠. 리얼맨은 박우람과는 달리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리무버에게 당해 히어로 능력을 상실하는 것이 두려운 나 vs 연약한 청년 박우람의 정체성이 리얼맨을 침범하는 것이 두려운 나

이렇게 시작한 [나 vs 나]의 갈등은 이야기의 클라이막스로 달려갈수록 확장되고 변화합니다. 결말에 이르러 리얼맨은 어떠한 선택을 하게 되는데, 이 역시 [나 vs 나]의 갈등 상황 속에서 내려진 선택이죠. 이 부분은 이야기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여기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무척 재미있는 소설이니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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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2 : 나 vs 남

이 유형의 갈등 역시 무척이나 익숙합니다. 말 그대로 나와 내가 아닌 누군가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입장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히어로와 빌런의 갈등이 대표적이죠. 범죄자와 경찰의 갈등도 그렇구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라이벌 구도’에서도 이 유형의 갈등이 지배적으로 드러납니다. 나는 살고 싶고, 너는 나를 죽이려 한다. 나는 탈출하고 싶고, 너는 나를 가둬두려 한다. 나는 지키고 싶고, 너는 빼앗으려 한다. 마음만 먹으면 한참을 더 쓸 수도 있어요.

사례 : 엄성용 <달이 오렌지색으로 보일 때>

나(성식)는 기분 좋게 술을 마신 상태에서 친구 철민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밤 하늘에서 달빛이 평소와는 다른 색으로 보이죠. 이 사실을 여자친구인 세영에게 메시지로 보냅니다. 달이 오렌지색으로 보인다고. 그리고 철민 역시 그 사실을 알게 되죠. 그리고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철민은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며 알 수 없는 대화를 시작하고, 세영은 철민에게서 당장 도망치라고 하죠. 여기에서부터 [나 vs 남]의 갈등이 시작됩니다.

철민에게 잡히지 않고 편의점에 도착해야 하는 나 vs 성식이 편의점에 도착하기 전에 잡아야 하는 철민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입장에 놓인 두 인물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일단 뜁니다. 잡아야 하는 사람과, 잡히지 않아야 하는 사람의 갈등이죠. 독자는 당연히 이들을 흥미롭게 바라보겠죠. 왜 잡아야 하는지, 왜 잡혀야 하는지 아직은 모르지만, 그래서 더 재미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이야기의 끝에서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이지요. 왜 뛰는지, 그리고 누가 이길지.
결말을 언급하면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역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짧지만 무척 재미있는 이야기에요. 괴이학회의 소설집 <괴이, 서울>에 실려 있습니다.

유형 3 : 나 vs 사회

이제부터는 조금 복잡한 유형의 갈등을 다루게 됩니다. [나 vs 남]의 갈등이 '1:1'의 구도를 취한다면, [나 vs 사회]의 갈등은 '1:다수’의 구도를 취합니다. 대표적으로 ‘법’이 그렇습니다. 내가 이 사회의 법을 어기면, 이 사회의 공권력은 나를 처벌하기 위해 움직입니다. 나는 당연히 처벌받기를 원치 않을 것이고, 공권력을 피해 달아나야겠죠.
법 뿐만 아니라 이 사회의 규범과 윤리, 혹은 지배적인 시선이나 편견 같은 것도 가능합니다. 동성 커플이 한국 사회에서 받는 차별과 편견을 생각해 보세요. 미혼모나 장애인, 백인이 아닌 외국인 역시 그렇습니다. 그들은 이 사회와 갈등을 빚을 수 있습니다. 차별과 편견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고, 혹은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해달라는 인정투쟁을 벌일 수도 있죠.
나아가 이 사회의 문제점을 깨닫고, 아예 그것을 전복시키려는 시도 역시 [나 vs 사회] 갈등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나는 법을 어겨야 하고, 아예 무력화시켜야 합니다. 법과 사회가 잘못되었다고 믿으니까요. 지금 예시로 다루고자 하는 작품이 이에 해당할지도 모르겠네요.

사례 : 블랙 미러 시즌1 2화 <핫 샷>

모두가 같은 옷을 입고 자전거를 타며 메리트(사이버머니)를 벌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근미래의 사회가 배경입니다. 광고를 건너뛰거나, 콘텐츠를 구매하거나, 음식을 구하는 데에 돈이 필요하죠. 돈은 사이클 머신을 타야지만 벌 수 있습니다. 이 세계의 모두는 자전거를 타서 돈을 벌고, 그 돈을 생활하는데 사용합니다. 오디션 프로그램인 ‘핫 샷’에 출전해서 연예인(?)이 되는 방법 외에는 이 삶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다만 ‘핫 샷’에 출전하기 위해서는 1500 메리트가 필요합니다. 꽤나 어마어마한 금액이죠.
주인공인 ‘빙’은 우연히 화장실에서 ‘애비’의 노래소리를 듣습니다. 감동한 빙은 애비에게 ‘핫 샷’에 출전할 것을 권합니다. 돈은 자신이 댈 것이라고 해요. 죽은 형제가 남긴 돈이 꽤 되거든요. 애비는 ‘핫 샷’에 출전하고, 멋진 노래를 부릅니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의 반응은 낯설었습니다. 가수는 너무 많으니, 포르노 배우가 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죠. 애비는 복합적인 이유로 그 제안을 수락합니다. 이를 지켜보던 빙은 무너집니다.
가진 돈을 모두 써버린 빙은 디스플레이에 표시되는 애비의 포르노 광고를 건너뛰지도 못합니다. 괴로워하던 빙은 자신이 직접 ‘핫 샷’에 출연하겠다며 돈을 모으기 시작하죠.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나 vs 사회]의 갈등이 시작됩니다. 빙은 ‘핫 샷’에 출연해서 이 사회의 부조리를 폭로하려 합니다. "이 사회는 거짓으로 가득하며, 진짜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핫 샷’은 우리를 착취하고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여러 난관을 통과한 빙은 결국 ‘핫 샷’ 무대에서 자기 목에 유리조각을 겨누고 눈물을 흘리며 절규합니다.
그러나 ‘핫 샷’의 심사위원들은 빙의 절규를 훌륭한 공연이라 평가합니다. 감동했다면서요. 그리고 빙에게 방송 프로그램을 편성하겠다고 합니다. 다시는 자전거를 타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서요.

빙은 자신이 속한 세계가 거짓이며 부조리하다다고 생각하여 무너지기를 원한다. vs ‘핫 샷’의 심사위원들은 이 세계의 규칙을 유지하고 싶다.

위의 갈등은 이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야 등장합니다. 이러한 갈등을 표현하기 위해 여기까지 달려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죠. 갈등 자체가 메시지가 되니까요. 자, 누가 이겼을까요? 빙의 절규 이후의 장면에서 그 대답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그 대답이 이 이야기의 결말이 되죠. 아주 재미있으니까 직접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유형 4 : 나 vs 신

여기에서 ‘신’이란 많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에서는 말 그래도 ‘신의 의지’가 이에 해당했어요. 오이디푸스와 헤라클레스가 받은 신탁이나 저주 등이 이에 해당하죠. 때로는 ‘운명’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거에요. 정해진 운명을 거부하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이에 해당합니다.
근대에 이르러 [나 vs 신] 유형의 갈등은 줄어드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 신 혹은 운명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니까요. 하지만 신의 자리를 다른 것들로 대체하는 경우는 꽤 있습니다. 자연 재해를 비롯한 ‘대재앙’이라 부를 만한 것들 말이죠. 그러니까 ‘신’이란, 인간이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이 세계의 절대적인 법칙을 의미합니다. 주인공이 (무조건)질 것을 알지만, 이에 저항하는 모습 자체를 그려내는 이야기가 이 유형에 해당합니다.
<아마겟돈> <딥 임팩트> 같은 영화들이 먼저 떠오르네요. <부산행> 이나 <해운대>가 떠오르기도 하구요.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이창동 감독 영화 <밀양>도 이에 해당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지금 다룰 이야기는 조금 더 귀여운 이야기랍니다.

사례 : dcdc(홍지운) <나암 왕국 이야기>

이 귀여운 이야기의 주인공은 새벽하늘빛의 드래곤 ‘귀리하시오’입니다. 귀리하시오는 나암 왕국의 후계자인 ‘다래 공주’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정작 다래 공주는 귀리하시오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이지만 말이죠. 여기까지만 보면 [나 vs 남 = 귀리하시오 vs 다래]의 갈등으로 발전하기 쉬워 보이는데요, 이 귀여운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드래곤 귀리하시오의 사랑은 다래 공주와 절대 갈등할 수 없을 만큼 순수하기(?) 때문이에요.
귀리하시오는 다래 공주에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당신은 아름답고,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그리고 진부한 멘트 한 마디를 덧붙이죠. 당신을 위해서라면 하늘의 별도 따다 줄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하는데요, 다래 공주가 냉큼 대답해버립니다. “따와.”
이 이야기의 [나 vs 신] 갈등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아무리 드래곤이라 해도 하늘의 별을 딸 수는 없으니까요. 이제 드래곤 귀리하시오는 별을 따서 다래 공주에게 가져오기 위한 모든 노력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드래곤 귀리하시오는 별을 따서 다래 공주에게 주고 싶다 vs 별은 누구도 딸 수 없다. 드래곤이라도 마찬가지다.

[나 vs 신] 유형의 이야기는 이 갈등에서 누가 승리할지에 대해서는 그리 중요치 않습니다. 독자들도 알고 있거든요. 당연히 주인공이 패배할 거라구요. 대신 불가능에 가까운 주인공의 욕망, 신에게 대항하려 하는 주인공의 욕망에 흥미를 느낍니다. 그가 어떤 노력을 할 것이며, 어디까지 성취할 것이며, 어디쯤에서 패배할 것인지를 궁금해 하는 것이죠.
<나암 왕국 이야기>는 dcdc작가 특유의 유머와 함께 아주 귀여운 동화로 마무리됩니다. 그 결말 역시 직접 확인하시는게 좋을 것 같아요.

갈등의 유형은 다양하게 활용된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이야기 하나가 갈등의 유형 하나로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오늘 언급한 네 개의 유형이 여러번 등장하기도 하죠. 예를 들어 ‘성장’을 테마로 한 이야기는 [나 vs 남]의 갈등으로 시작했다가, 종국에는 [나 vs 나]의 갈등임을 깨닫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 문제를 다룬 미스터리의 경우에는 [나 vs 남]의 갈등으로 시작해서 [나 vs 사회]의 갈등으로 확장되는 경우가 많죠. 고대 그리스의 비극에서는 [나 vs 신]의 갈등으로 시작해서 [나 vs 나]의 갈등으로 변화하기도 하고, 반대로 [나 vs 나]처럼 보였던 갈등이 알고보니 [나 vs 신]이었다는 구조도 종종 등장합니다.
어쨌든, 꽤 많은 이야기가 오늘 언급한 갈등의 네가지 유형을 활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시험 문제 푸는 것도 아니고, 유형을 정리해서 뭐에 쓰느냐 하실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저는 이야기에서 갈등을 찾을 때 습관적으로 그 유형을 분류해 보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늘 그렇지만 저는 이야기가 어떤 원리로 구성되어 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거든요. 그것들을 파헤치다 보면, 이 이야기를 내가 왜 재미있어했는지, 혹은 왜 지루해했는지에 대해 조심스레 대답할 수 있게 되기도 하구요.
결국 창작자는 자기 이야기의 첫 번째 독자일 수 밖에 없고,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가 어디서 어떻게 왜 생겼는지 알아내야 해요. <신스텔러>에서 다루는 내용들이 그 과정에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음 이야기
Shin이 소개하는 좋은 이야기 단편집 <근방에 히어로가 너무 많사오니> 황금가지 단편집 <괴이, 서울> 괴이학회 dcdc(홍지운) 단편집 <구미베어 살인사건> 아작 넷플릭스 드라마 <블랙 미러 시즌1>
글. Shin(김신) "이 글이 좋으셨다면 사례로 언급한 작품들도 한번 감상해 보세요. 아주 재미있을 거예요."
편집. Sol(고은비) "정말 신기하게도 지금 떠올려본 모든 이야기의 갈등이 이 네 가지로 분류되네요. 여러분도 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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