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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해하는 세력 : 나쁜 놈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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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고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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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
베테랑
오늘은 기사를 하나 읽고 시작하겠습니다. 2015년 10월 19일에 조선닷컴에 실린 <OSEN 김범석의 사이드미러 : '마션' '인턴' 뻔한 안타고니스트 전략 피해 간 모범 사례>라는 기사입니다. (제목부터 강력한 어그로를 발산하고 있군요...)
“두 영화는 신기하게 안타고니스트를 활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묘하게 닮았다. 보통 주인공의 극적 갈등과 멋진 해결을 도드라지게 보여주기 위해 거의 모든 극에 안타고니스트를 내세우기 마련인데 두 작품 모두 이 전략을 과감히 생략한 것이다. ‘드라마틱’을 위해 다소 전형적이고 MSG인 줄 알지만 첨가할 수밖에 없었던 악역을 레시피에서 과감히 뺀 세련된 용감함으로 볼 수 있다.”
(기사 본문 중)
당시 이 글을 읽고 많이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왜 그랬는지 오늘 신스텔러를 통해서 풀어 보죠.

'안타고니스트 Antagonist'에 대한 오해를 풀자.

고대 그리스어 ἀντί (anti, "대항하여") + ἀγωνιστής (agōnistēs, "전투자") > ἀνταγωνίζεσθαι ("대항하다") > ἀνταγωνιστής ("상대자") > 라틴어 antagonista (출처 : 위키낱말사전) 그리스어 쓸 줄 몰라요.
그렇다고 합니다. 제가 몰라서 위키를 찾아본 것은 아니구요, 사실 연극을 공부할 때부터 안타고니스트에 대해서 배우기는 했어요. '프로타고니스트 Protagonist'를 주인공이라 부르고, 그 주인공과 대립하는 사람을 '안타고니스트 Antagonist'라 불렀다고 해요. 그러니까 이 두 개념은 상대적인 개념이에요. 선한 인물 악한 인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누구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죠. 예를 들어 피터팬이 주인공이면 안타고니스트는 후크 선장이구요, 후크 선장이 주인공이면 안타고니스트는 피터팬이 되는 셈이죠.
고대 그리스 시절에는 연극을 인간이 만들고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예술 형식으로 꼽았다고 해요.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이라는 책을 썼고, 여기에서 '시'는 곧 연극이었죠. 아마 이 책에서도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거예요. (아이스퀼로스가 뭐 안타고니스트를 등장시켰고 어쩌고저쩌고...)
그러니까 왜 또 그리스 비극 이야기를 꺼내냐면요, 이 '안타고니스트'라는 녀석을 함부로 '악역' 혹은 '적대자'라고 정의하면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에요. 물론 단어 뒤에 -ist 이런 게 붙어서 인간을 부르는 단어로 보는 것이 맞죠. 하지만 '안타고니스트'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은유'라는 말을 하고 싶어요. 단순히 '악역'이나 '적대자'로 볼 것이 아니라, 주인공(=프로타고니스트)를 방해(=anti)하는 유/무형의 모든 것(=세력)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은 거예요. 악역이나 적대자는 그 '세력'들 중 일부인 것이지, 방해하는 '세력'을 대변할 수는 없다는 거예요.

<마션>에 안타고니스트가 없다?

자, 안타고니스트는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말씀드렸죠. 안타고니스트를 찾으려면 프로타고니스트를 먼저 찾아야 해요. <마션>의 프로타고니스트는 마크 와트니(맷 데이먼)입니다. 마크는 화성 탐사선 아레스3의 대원이었고, 이런저런 일(= 화성폭풍)로 인해 홀로 화성에 남겨지게 됩니다. 마크는 집에 가고 싶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마크의 집은 지구에 있다는 것이죠. 현재 마크는 화성에 있고요. 그것참 사소한 문제네요.
주인공의 욕망 = 집(=지구)에 가고 싶다. (살아서) 방해하는 세력 = 여기는 화성입니다만.
<마션>의 안타고니스트는 화성입니다. 누가 뭐래도 화성이에요. 화성만 아니면 마크에게 문제 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니까요. 그래서 영화 제목도 <마션(Martian)> 아니겠어요?
화성이 잘못했네
물론 이 영화에 주인공의 욕망을 방해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아요. 화성이 사람은 아니니까. 그래도 위의 기사에는 아주 오해를 살 만한 문장들이 있어요. 예를 들면,
"보통 주인공의 극적 갈등과 멋진 해결을 도드라지게 보여주기 위해 거의 모든 극에 안타고니스트를 내세우기 마련인데 두 작품 모두 이 전략을 과감히 생략한 것이다."
여기에서 '안타고니스트'를 '사람'으로 한정한다면, 일단 '거의 모든 극에 안타고니스트를 내세우기 마련이다'라는 말이 성립하지 않아요. 주인공의 욕망을 방해하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는 아주 많거든요.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영화 <국제시장>을 떠올려 보세요. 이 영화에서의 안타고니스트는 '가난'이에요. 주인공 덕수(황정민 분)의 욕망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거잖아요. 이를 방해하는 사람은 없어요. 다만 가난하기 때문에 덕수는 독일 광산에 가기도 하고,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남진을 만나기도 해요. (처 푸른 초워뉘에)
악역을 고르시오.
거의 모든 극에 '사람'으로서 안타고니스트가 등장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것이 '보통'은 더더욱 아니고요. 그렇다면 위 기사에서의 '안타고니스트'는 '사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방해하는 세력'이라고 봐야 합리적이고, '방해하는 세력'에는 '화성'이나 '가난'도 포함되기 때문에 또다시 오해가 발생하는 것이죠. 여러모로 오해가 심한 글이에요. 더 충격적인 내용은 기사 말미에 나오는데요,​
"‘인턴’ 역시 신구 세대의 공존과 경험으로 상징되는 아날로그의 가치, 세상에 쓸모없이 태어난 이는 단 한 명도 없다는 메시지를 주는데 주력할 뿐 판에 박힌 안타고니스트 전략을 애초부터 접은 것으로 보인다. 시나리오 단계부터 확신이 섰다면 전형성과 자질구레한 플롯에서 얼마든지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걸 두 영화가 보여준 사례다."
'판에 박힌 안타고니스트 전략'이 대체 뭐죠? 전형성과 자질구레한 플롯이요? 이야기에서 주인공의 욕망을 방해하는 존재는 엄청 소중해요. 조커가 없으면 배트맨도 없어요(다크 나이트). 타노스가 없으면 어벤저스도 없다고요(어벤저스:인피니티 워). 가난이 없으면 덕수도 없고(국제시장), 화성이 없으면 마크 와트니도 없고(마션), 조태오가 없으면 서도철도 없어요(베테랑).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는 상대적일 뿐 아니라 서로에게 필수적인 요소에요.
상부상조 투샷
영화 <베테랑>에서 서도철이 조태오에게 말해요. "내가 죄짓고 살지 말라 그랬지?" 조태오가 대답해요. "어이쿠 죄송합니다 형사님." 이러면 이야기 자체가 성립하지 않아요. 조태오는 안타고니스트에요. 주인공의 욕망을 방해하는 존재죠. 서도철의 욕망이 '조태오를 잡아 법의 심판을 받게 하고 싶다'라면, 조태오는 곧 죽어도 잡히지 않으려 발악하는 사람이어야 해요. "어이가 없네"를 외쳐야 하고, 명동 한가운데서 이종격투기를 해야 하는 거예요. 이게 전형성이고, 자질구레한 플롯이라고요?

'누구일까?' 아니라 '무엇일까?'

위의 기사와 같은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저는 '안타고니스트' 보다는 '방해하는 세력'이라는 표현을 즐겨 쓰는 편이에요. 주인공을 방해하는 요소는 정말 다양해요. 지난 [신스텔러 5회]에서 <갈등의 유형>에 대해 다룬 내용 기억하세요? 총 네 가지의 유형에 대해 말씀드렸잖아요. [나 vs 나] [나 vs 남] [나 vs 사회] [나 vs 신] 나와 남, 사회와 신(=세계) 모두 안타고니스트가 될 수 있어요.
주인공의 욕망을 방해하는 세력이라면,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한 주인공의 행동을 좌절시키고자 하는 존재라면 무엇이든 안타고니스트가 될 수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 이렇게 질문해야 해요. '안타고니스트가 누구일까?'가 아니라, '방해하는 세력이 무엇일까?' 하는 질문으로요.
그러니 반드시 '악역', '방해꾼' 등 주인공을 방해하는 '사람'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 삶에서 우리를 방해하는 세력은 정말 다양하니까요. 원고 마감을 해야 하는데 넷플릭스를 켜고 싶고(나 vs 나), 공모전에 당선되고 싶은데 경쟁자는 많고(나 vs 남), 글 써서 먹고살고 싶은데 요즘 사람들은 책을 안 사고(나 vs 사회), 넷플릭스도 참고 공모전에도 당선되고 책도 잘 팔리는데 어느 날 사고로 세상을 떠요(나 vs 신). 우리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방해가 이야기에서도 나타날 수 있어요. 정말 나쁜 놈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니까요.
참 묘하죠. 우리와 우리 주변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만 해도 이야기를 만드는 원리들을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이론이라는 것이 대체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고요.
다음 이야기
Shin이 소개하는 좋은 이야기 리들리 스콧 감독, 영화 <마션> 앤디 위어, 소설 <마션 : 어느 괴짜 과학자의 화성판 어드벤처 생존기> 낸시 마이어스 감독, 영화 <인턴> 윤제균 감독, 영화 <국제시장> 류승완 감독, 영화 <베테랑>
글. Shin(김신) "김범석 기자님 죄송합니다."
편집. May(김미루) "기사 논리대로라면 국제시장도 안타고니스트의 전형성을 탈피한 모범적 영화가 되는 건데요...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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