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안녕하세요 카야!
A. 안녕하세요, 리서치 인턴으로 입사하여 프로듀싱 인턴으로 전환된 카야입니다!
Q. 영상을 전공했다고 들었어요. 학교에서 영화를 제작해 극장에 올렸을 때 어떤 느낌이었나요?
A. 학창시절,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하고 싶었고 시인이셨던 담임 선생님께서도 적극 추천해주셨어요. 하지만 ‘애매한 재능으로 설치면 안 되지!’ 하고 지레 겁먹고 포기했습니다.
대신 시나리오와 미학을 배울 수 있는 영상학과로 타협했는데요, 촬영장은 예술보단 노동의 현장 같더라고요. 촬영장에 정을 붙이지 못한 저는 학보사 및 신문사에서 기사를 쓰고, 학과에선 미학 위주의 수업을 들으며 (방황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전공 필수로 영화 한 편을 반드시 제작해야 했어요. 제작비는 운 좋게 한국콘텐츠진흥원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해결할 수 있었지만(무한 감사), 그냥….그냥 찍기가 너무 싫더라고요. 그래도 학우들의 도움을 받아 어찌어찌 찍어내고, 밤새워가며 편집하고, 학과 영화제 날 영화의 전당 소극장에 영화를 올렸는데.
저는 그때 수많은 영화 감독님들의 마음을 감히 헤아려보게 됐어요. 내가 상업영화 감독이었으면 매일매일 온종일 표 끊어서 영화관 죽치고 있었을 거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제 머릿속에 모호하게 존재하던 이미지와 상념이 하나의 인격이 되어 살아 움직이고, 하나의 세계가 창조되는 순간을 목격하는 것은 정말 잊을 수 없는 감각이었습니다.
그리고 문득 초등학생 때가 떠올랐어요. 그 언젠가, 그림 잘 그리는 친구를 캐스팅해 함께 만화 한 편을 제작했던 시절이요. 제가 글 작가를 맡고, 친구가 그림 작가를 맡았는데 친구들에게 100원의 대여비를 받고 저희의 만화책을 보여줬어요. 총 800원쯤 벌었던 것 같은데, 창작물로 수익을 낸 최초의 경험이네요.
저는 운명론자가 아니지만, 왠지 그때가 제 인생의 복선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겁먹고 창작의 길을 피했지만 결국은 돌고 돌아 창작을 사랑하게 되었으니까요. 제가 이 생각을 한 게 24살 2월인데 안전가옥에 입사한 게 11월이니 타이밍조차도 운명 같지 않나요?! 그렇지만 저는 정말 운명론자가 아니긴 합니다.
Q. 협업하며 영화를 만들었던 경험, 안전가옥과는 어떻게 연결된 것일까요?
A. 제가 안전가옥에 입사할 때 작성한 지원서에 이런 말을 적었어요.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있지만, ‘백지장 정도는 혼자 드는 게 편할 것 같은데’ 싶은 순간들이 사실은 많았다고요. (ex. 교양 조별과제…) 하지만 뒤에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함께’ 했기 때문에 영화도 찍을 수 있었고, 공모전 수상도 할 수 있었다고요.
학과 광고영상 동아리 회장을 하면서 아이디어를 쌓아가고, 특히나 영화를 하나 찍으면서 ‘함께 하는 것’의 힘이 얼마나 큰지 깨달을 수 있었어요. 숫자가 아닌 사람의 경우 1+1은 2보다 크다는 것을요. 2보다 더 큰 품이 들 수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2보다 더 큰 결과물도 나올 수 있다는 걸, 저는 그런 순간을 아주 많이 목격했습니다.
이런 제게 ‘함께 협업하여 창작한다’는 안전가옥의 모토는 아주 설득력 있고, 매력적이었습니다. 안전가옥이 만들어갈 세계의 한 부분이 저의 조각으로 채워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