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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소녀>를 봤습니다

분류
운영멤버
기획PD
작성자
레미
운영멤버들의 6월 월간 안전가옥은 "이번 달에 본 콘텐츠"라는 주제로 작성되었습니다. 안전가옥에서 일하는 운영멤버들은 6월 한 달 간, 어떤 영화, TV쇼, 책, 만화, 다큐멘터리를 보았는지 함께 살펴봐요 *대상 콘텐츠의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레미가 본 콘텐츠

야구소녀 영화 2020년 개봉, 최윤태 감독
출처: Daum 영화
<야구 소녀> 가 개봉한다길래 잠시 고민했다. 영화관에 가서 볼까 플랫폼에 뜨면 볼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2018년 어느 날, 지인에게 이 영화가 제작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이 영화를 기다렸다. 그는 당시 내가 쓰고 있는 시나리오와 비슷한 아이템이 영화아카데미에서 준비되고 있으니 왠만하면 이야기가 겹치지 않아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오랫동안 품어온 영화로의 열망을 시나리오로 풀어 내고 있던 내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그 해 가을, 나는 직접 쓴 시나리오를 들고 피칭을 했고, 그 다음 해인 2019년에는 <야구소녀>의 영화제 프리미어 티켓을 구하고도 끝내 보지 않았다. 내가 만들고 싶었던 세계, 내가 잘 해내고 싶었던 이야기가 다른 이의 손끝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니 조바심과 질투심에 도저히 볼 수 없었다. 다행히도 영화를 보고 온 동료들이 내가 준비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해줘서 안심했다. 난 영화에 대한 즐거운 기대감보다는 노심초사한 마음으로 영화관에 갔다.

이 시대에 너무 필요한 서사인 야구소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야구소녀>는 정말 잘 만든 영화였다. 이 영화는 저예산으로 야구라는 스포츠의 묘미도 알려주는 것도 모자라, (일반인이라면 잘 모를수도 있는 실력있는 여자 야구선수에 대한 존재를 부각시킬 뿐만 아니라) 자신의 꿈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뛰어넘는 가슴 찡한 성장서사다. 만화책에서 자주 접하듯, 실력은 출중하나 가난한 고교 운동 선수가 갑자원이나 대통령배 같은 큰 대회에 어렵사리 입성하여 승리를 맛보는 성장서사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식상하다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이 뻔한 서사의 주인공은 ‘여성’이고, ‘야구’를 하는 것도 모자라 남자들과 경쟁하여 당당히 프로야구 2군에 입단해버리니 이 정도까지 나아간 이야기를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든 시대 정신은 바야흐로 페미니즘적 태도를 탑재하고 있지 않으면 뒤쳐진 취급 받기 마련인데, 제 아무리 한국 상업영화 흥행 50위권 중에 8할이 조폭이요 범죄요 전쟁물일 지언정, 글로컬을 향해가는 요즘 한국 영화들은 페미니즘을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니라 제 것으로 잘 소화하고 있고, 야구소녀는 이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나보다 먼저 영화를 보고 온 친구들 덕분에 영화의 결말을 다 알아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모든 공식을 충족시키는 ‘야구소녀’가 만족스러웠다. 주인공의 성별을 떠나 자신이 사랑하는 주인공의 삶이 내가 한 때 동경했던 삶이라 영화로의 재현이 나의 판타지를 깨버릴까 걱정했던 것은 기우였다. 손에 쥔 팝콘도 먹지않고 진지하게 영화를 봤다는 사실을 막이 오른 뒤 깨닫고, 돌아오는 길에 유명한 남자배우들이 등장했던 야구영화들을 떠올려 보았다. 관중이 꽉 찬 스타디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선수들의 긴장감, 딱 하고 울려퍼지는 배트 소리, 어떤 때는 실감나는 킹콩이 선수로 등장하기까지…(고릴라였나?^^;;) 스포츠라면 응당 보여주는 스펙터클한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면서 ‘야구소녀’의 주수인이 얼마나 야구선수다웠는지 새삼 다시 깨달았다. 그녀는 성별을 떠나 포기하지 않는 스포츠 정신을 지닌 멋진 고등학생이었다. 아마도 나는 한국의 야구영화를 손으로 꼽으라면 이 영화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보는 내내 너무 즐거운 서사였던 야구소녀

사실 이 영화는 시대정신이나 의미를 뛰어넘어 자~알 만들었기 때문에 더 즐거운 영화였다. 적은 예산으로 스포츠 영화를 만드는 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한 달 간 독립야구단에서 연습을 했다는 이주영 배우(극 중 ‘주수인’)는 투구폼이 예사롭지 않았고, 영화 속에서 수인이를 가르치는 걸 탐탁치 않게 여겼던 코치가 수인이의 열정과 능력을 다시 보고 그녀만 지닌 장점을 살리려는 부분에서는 ‘와, 내게도 저런 코치나 멘토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 만큼 감동적이었다. 이 영화는 관중을 동원하거나 넓은 스타디움을 빌릴 수 없는 대신 현실감 넘치는 시나리오와 매력적인 배우들의 명연기가 조화를 이루었다. 코치가 선수였던 시절, 자신만의 장점을 알아봐주지 않았던 스카우터와 고정관념으로 가득찬 야구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프로로의 꿈이 좌절되는 순간은 수인의 미래와 자연스레 겹쳐져 보였고, 수인의 엄마가 수인이에게 꿈이 밥먹어 주냐며 돈 벌어오라고 말하던 장면, 억척스러운 엄마라 미안하다며 방문을 나가며 말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였다. 이 때부터 이 영화는 스포츠 드라마인 동시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의 성장 드라마로 읽히기 시작한다. 조금 답답하지만 수인을 지지하는 아빠와 리틀야구 때부터 수인이의 공을 받아주는 포수와의 우정은 어디서 많이 본듯하지만, 군더더기 없는 씬 구성과 버릴 것 없는 대사들이 자~알 만든 영화란 무엇이고 웰메이드 영화가 관객을 얼마나 즐겁게 몰입하게 만드는지 잘 보여준다.

아쉬울 수 밖에 없는 새로운 서사로의 가능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또 보겠냐 묻는다면 한 번 주저하게 된다. 내가 놓친 것은 없는지 이 영화의 다른 매력을 탐구하고자 기꺼이 다시 보는 선택을 할 것 같지는 않다. 영상의 스타일이나 서사의 쾌감으로 다시 보기엔 허세를 부리지 않은 드라마에 가깝고, 전에 없던 서사 / 익숙치 않은 서사라 다시 또 의미를 곱씹자니 이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가 명명백백하다. ‘단점을 보완하려고 하지말고, 장점을 잘 살려야지.’ 라고 말하는 코치의 말처럼 이 영화는 본인(영화 제작진)이 가진 장점을 잘 알고 좋은 드라마를 만들었다. 수인이가 구단 측의 제안을 거절하는 장면에서 나는 이 영화 뒤에 나올 새로운 서사들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이야기로 배가 부르지 않았달까. (왠지 내가 쓴게 야구소녀의 후속 이야기 같기도 하고...ㅋ)
새로운 서사로의 가능성 특히 영화와 소설이 가진 다른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본다. 영화가 만드는 품도 들고, 시장과의 친밀감을 위해 앞으로 많이 나아가지는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면(물론 영상화 기술로 논리적 정합성을 차치하고 이야기가 실재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소설은 작가가 읽는 이를 끝도 없이 쥐락펴락할 수 있다. 매우 경제적으로. 이 글을 읽을지도 모를 수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문장으로 독자들에게 ‘예기치 못한’ 즐거움을 전하는 걸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진심으로 전에 없던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상상력을 너무나 보고 싶습니다!!!! 픽션이라는 세상 속에서 현실을 딛고 앞으로 더 나아가고 싶다면 안전가옥으로 오세요. 진짜 매력 넘치는 새로운 이야기 같이 한 번 만들어 봅시다.
*글 속에서 영화 스포는 최대한 피했으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영화는 2번 볼 가치가 있습니다.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운영멤버 레미
"본인은 선수 지망이나 스카우터가 더 어울린다 생각하는 레미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