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시국을 맞아 국내외 여러 칼럼에서 다시금 주목받고 소환되는 인물이 있습니다. 역학(疫學)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존 스노우입니다. (왕좌의 게임이 나오는 그 사람 아닙니다) 그는 1853년 런던에서 발생한 콜레라 대유행의 원인을 조사하면서, 당시 대유행의 진원지인 런던 브로드가 거리를 일종의 탐정처럼 샅샅이 돌아다니며 일종의 사망자 지도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 지도를 통해 콜레라가 물을 통해 사람들 간에 전염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내 뒤 브로드가의 우물 펌프 손잡이 제거를 요청하여 더 큰 희생을 막았다는 일화를 남긴 인물입니다.
보통은 여기서 이야기가 그칩니다. 존 스노우의 노력으로 전염병에 대한 정체가 밝혀지고, 병이 더 이상 퍼지지 않았다, 그의 노력이 대단했다, 그를 본받아야 한다 정도의 교훈이 담긴 이야기로 말이지요. 인물과 배경은 확실히 있지만, 사건은 되게 단순해 보이는 이 이야기 속에는 사실 흥미로운 몇 가지 사건이 감추어져 있거나 덧입혀져 있습니다.
원래 인도 갠지스강 일대의 풍토병이었던 콜레라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로 세계가 넓어지면서 전 세계로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1800년대부터 1900년대 후반까지 몇 차례에 걸쳐 크게 창궐하면서 수백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조선 말과 한국에도 ‘호열자’라는 이름으로 큰 악명을 떨치기도 했지요. 아무튼 1800년대 당시 최고의 발전을 구가하던 런던도 콜레라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1832년 1차 대유행 기간 6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특히 빈곤층, 하층민들의 삶을 집중적으로 공격했습니다. 이때 대다수 의사를 포함한 많은 사람은 콜레라가 저렇게 많은 사람들을 전염시킨 건 공기의 오염, 독기론(미아즈마, miasma)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보통 악취가 나는 하수구나 늪지대와 그 근방에서는 전염병이 잘 돌기 때문에 나온 이론인데 그런 악취가 나는 곳에는 하층민들이 있었기에 그들이 뿜어내는 더러운 공기가 원인이라고 믿었던 것이지요.
그러던 중 1848년 2차 대유행이 시작되었습니다. 마취의사였던 존 스노우는 평소 콜레라 전연 인자를 찾기 위해 노력하다 우연히 템스강 식수 공급 회사에 따라 사망자가 달라지는 데이터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독기가 아닌 물로 콜레라가 전염된다고 주장했지요. 사람들 특히 전문가들은 한낱 마취의사가 뭘 아느냐고 (아주 옛날에나, 그때나, 지금이나 이런 모습은 항상 똑같네요) 그의 의견을 무시했습니다. 수 만 명의 목숨이 사라졌지만, 변화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존 스노우는 좌절하지 않았더군요. (오, 영웅 서사) 1850년 전 세계 최초로 역병 학회 (영국 역병 학회)를 조직하여 창립 멤버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 할 수 있는 데이터를 차분하게 확보하던 중 1853년 세 번째 콜레라 대유행이 시작되어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는 브로드가로 달려가서 유족들과 면담을 시작했습니다. 누가 언제 죽었는지 꼼꼼하게 표시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의 펌프를 중심으로 사망자가 쏟아져 나왔음을 알게 되었죠. 더욱 확실한 데이터가 필요했지만, 독기가 떠도는 죽음의 거리를 사람들을 떠나가고 있었고, 물 때문이라는 그의 말은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24시간 동안 온 거리를 떠돌았습니다. 대량의 사망자가 나온 건물 바로 옆에 있는 맥주 공장 인부들은 물을 마시지 않고 맥주를 마셔서 한 명도 콜레라가 걸리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다음 24시간 동안에는 당시 런던 사람들의 출생 및 사망 정보를 정리하고 있던 등록청에 가서 그곳 직원 윌리엄 파가 건네주는 자료는 분석했습니다. 결국 모든 데이터는 브로드 가에 있는 오염된 우물이 원인임을 가리키고 있었고, 우물을 관리하는 보건관리 위원회는 반신반의하며서 펌프 손잡이 제거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곤 기적처럼 다음 날부터 전염병이 돌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물로 병이 옮겨가는지, 그 원인을 찾지 못했으니까요. 그때 존 스노우를 찾아온 사람이 있습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죽은 브로드 가 교구의 신부였던 헨리 화이드헤드였습니다. 그는 지속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장례를 집전하면서, 일종의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물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주장을 하는 스노우에게 그게 정말로 맞는 말인지 따지기 위해 찾아간 것이지요. 안그래도 슬픈데, 헛소리를 하는 것이라면 더 이상 사람들을 괴롭히지 말라는 의미로요.
그러나 존 스노우는 화이트헤드에게 자신이 오랫동안 세워왔던 가설과 그를 뒷받침하는 데이터를 열과 성의를 다해 설명합니다. 브로드가의 우물을 오염되게 한 원인은 찾지 못했지만 질병의 매개체는 오염된 물이 확실하다고요. 그때 존 스노우는 화이트헤드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날이 올 때까지 살지 못하거나, 제 이름은 그날이 되면 잊혀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콜레라 대유행이 한낱 과거의 일로 치부되는 그날은 꼭 올 것입니다. 그리고 콜레라가 전파되는 방식에 대한 지식은, 콜레라는 영원히 사라지도록 만들 것입니다.”
존 스노우보다 더 지역민들에게 명망이 높았던 화이트헤드 신부는 우물 주변 사람들에게 다가갑니다. 그러다 신부는 찾아냅니다. 콜레라 대유행 이틀 전에 콜레라가 발병한 0번 환자, 최초의 사망자였던 갓난 아기의 사망자 명부를 말이지요. 신부는 그 아기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 집은 문제가 되었던 펌프의 바로 앞 집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아기의 엄마를 만나 이야기를 들은 후 그는 사건의 시작을 재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1853년 8월 31일 브로드가의 한 여자아기가 콜레라가 걸렸다. 아기는 9월 2일 사망했다. 아기의 엄마는 8월 31일부터 9월 2일 사이 아기가 사용했던 기저귀를 빨고나서 그 물을 집 앞의 웅덩이에 그냥 버렸다. 60cm 정도 떨어져 있는 브로드가 펌프 벽의 미세한 균열을 통해 웅덩이의 오염된 물이 펌프 안으로 침투했다. 그리고 그 펌프의 물을 사용한 브로드가에 있는 500명이 콜레라고 사망했다. 그 사이 원인이 되었던 웅덩이의 물은 모두 말라서 흔적이 사라져 오염원이 남아있지 않았다. 이 사실을 모르는 한 의사가 이 모든 상황을 추리하여 펌프를 멈추게 했지만 원인물질을 발견해 내지 못하였다. 이것이 브로드가 펌프사건의 전말이다.’
그 뒤 존 스노우는 갑작스러운 뇌졸중으로 사망하고, 몇 년 뒤 1866년 런던에 다시 콜레라가 유행할 조짐이 보였지만, 1853년 당시 그를 도왔던 등록청 직원, 윌리엄 파가 존 스노우의 유지를 이어 조기에 콜레라를 제압하고, 런던에 하수도 설비가 완비되며 콜레라는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콜레라 세균을 발견한 과학자와 균을 믿지 못하고 콜레라균을 배양한 물을 마신 과학자 등 이야기는 더 퍼지게 됩니다만 너무 길어지게 되니 콜레라 이야기는 이쯤에서 멈추도록 하겠습니다.
최근 모든 이슈, 모든 이야기를 코로나라는 아주 작은 바이러스가 지배했습니다. 이 여파가 어디까지 갈지 모르겠지만 코로나19 이후는 쉽게 그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정도로 깊은 골짜기를 파둔 것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이 사회적 현상이 어떠한 변화를 불러일으킬지, 어떤 복잡다단함을 만들어냈는지는 아직 함부로 판단하기는 이르지만, 어쩌면 존 스노우의 일화가 저한테는 일종의 힌트가 되는 것 같아 월간 안전가옥으로 남겨봅니다.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운영멤버 테오
"원래 이 글의 시작은 《콜레라 시대의 사랑》과 다른 책과 영화와 기타 등등 감상을 잘 엮어보려고 시작했던 글이지만 몇 번의 엎어짐 끝에 마감 시간에 간신히 나온 글입니다. 네, 쓸데없이 길어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