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월간 안전가옥, 운영멤버들은 "올해의 ㅇㅇㅇ"이라는 주제로 썼습니다.
아쉽고, 새롭고, 빠르고, 기묘한 2020년. 2020년에 본 콘텐츠 중에 상을 주고 싶은 작품, 인물, 장르 등등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올해의 '불쾌한 쾌감'은 무엇인가요?
*대상 콘텐츠의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헤이든이 뽑은 올해의 '불쾌한 쾌감'
마리 유키코, <이사>
소설
올해 저희 부모님이 이사하셨습니다. 이사를 다 한 후 정리가 얼추 끝나고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잡담을 나눴습니다. 엄마는 얼마 전, 이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엄마가 다니던 전 회사의 사장님과 마주쳤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알고 보니 사장님도 같은 동에 이사를 온 것이었습니다. 두 분은 서로의
안부를 묻다가, 같은 동 14층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야기는 14층에서 서늘하고 을씨년스러운 기운을 느꼈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동산 중개인이 14층을 먼저 보여주기에 먼저 둘러봤는데, 햇빛도 잘 드는 집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한기가 느껴지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두 분 모두 다른 층 집을 보고 싶다고 했었고 결국 14층이 아닌 각각 다른 층에 입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두 분이 14층 이야기를 나눈 것을 보면 14층이 정말 이상하긴 이상했던가 봅니다.
어쨌거나 엄마는 14층과 구조도 같고 층수도 한두 층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데다, 일조량도 비슷해 보였는데 왜 그토록 그 집만 한기가 돌던지 이상하더라는 말씀을 하시며, '그 집만 아직도 안 나갔대.'라는 말도 덧붙이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얼마 후 마리 유키코의 <이사>를 읽었습니다. 이 작은 책은 이사를 주제로 한 공포 미스터리 장르의 소설집입니다. 문, 수납장, 책상, 상자, 벽, 끈. 이렇게 공간과 관련된 키워드가 목차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첫 번째 이야기가 유독 기억에 남습니다. 여자가 이사할 집에 갇히는 내용인데요, 다른 단편보다도 유독, 이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 것을 보면 제 안에 어딘가 갇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 않은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단편집을 다 읽고 난 후에 본가에 다시 내려갈 일이 있었는데, 모두가 외출하고 집엔 저 혼자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새로운 집 이곳저곳을 구경하다가 거실 옆으로 달린 발코니에 들어가 봤습니다. 발코니 저편 끝에 또 하나의 문이 있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그곳은 비상시 탈출을 위한 공간이었습니다. 옆집과 공유한 벽에는 화재 발생 시 이 벽을 부수고 탈출하라는 문구가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 순간에 <이사>의 <문>이라는 단편이 떠올랐습니다.
공간에 닫힌 문을 보자마자 단편집 속 한 이야기가 떠올랐고 순간 소름이 돋아서 그 공간을 박차고 나왔습니다. 공포감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뜻밖의 단일한 경험이 아니라 일종의 기분 나쁨이 차곡차곡 쌓여야 공포감이라는 것이 발생하는 거 아니겠어요? 저에게는 올해 한 이사, 엄마의 이사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마리 유키코의 단편집 속 이야기들이 잘 쌓여서 좋은 재료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뭐, 다행히 갇히진 않았어요. 무사히 밖으로 나와 옷을 입고 산책하러 나갔습니다.
올해 읽고 본 것들을 헤아려보니 읽은 것은 많은 것 같은데, 앉은 자리에서 후루룩 읽었던 책은 몇 권 없었던 것 같습니다. 유독 힘 빠지고 피곤해서 읽다가 잠들고 다음 날 다시 앞장을 뒤적이는 짓을 참 많이도 했답니다. 그러던 중에 짧고 쉽고 자극적인 이야기가 여러 편 담긴 이 단편집을 접했습니다. 밤에 홀로 앉아 다 읽어버린, 저에겐 올해의 책입니다.
마리 유키코는 이야(いや)와 mystery를 합친 합성어 '이야미스' 장르의 작가라고 하지요. 이 책 속 이야기들 또한 기분 나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올해의 불쾌한 쾌감 왕으로 두 엄지 치켜들고 싶네요.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운영멤버 헤이든
"부디 악몽을 꾸지 않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