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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장르 좋아하냐 <데카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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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도 어느덧 1/3이나 훌쩍 지나버렸네요. 하루하루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책, 영화, 드라마, 유튜브 등 다양한 형태로 내 곁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돌아봤습니다. 2021년 4월 월간 안전가옥의 주제는 '2021년 1분기 나의 원픽 콘텐츠' 입니다.
주자 1, 3루 상황. 타자는/ 투수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자, 이 때 1사 인지 2사 상황인지, 주자가 누구인지, 현재 몇대 몇인지, 지금 몇회고 투수는 누구고 몇번째 투수고 공은 몇개 던졌는지, 이런 걸 바로 궁금해 하는 사람이라면 당신과 나는 우리다. 자, 주자가 최원준에 김선빈이다. 타석엔 최형우고 지금 1점 뒤지고 있는 8회 1사, 투수는 키움의 조상우. 자 이 정보에 더 머리가 핑 돌아가는 사람? 반면 지금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음..
이분이 최형웁니다. 저랑 동갑이에요.
‘장르’가 스포츠 규칙과도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 법칙이 왜 만들어졌는지 알기 어려운 것들이 많고, 그 역사가 오래된 종목일 수록 그 규칙이 꽤 복잡해서 알기도 이해하기도 어렵다. 아는 사람들도 정확히 그걸 언제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고, 그게 쌓이면 진입장벽이 되어 초심자의 유입을 가로막는다. 대신, 그 경지를 넘어가기만 한다면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새 세상이 열리는거지.
최근 넷플릭스에서 애니메이션 <데카당스>를 보며, 간만에 아주 빠져들어 재미있게 보며 그런 생각을 (새삼 다시 한 번) 했다. 아.. 내가 꽤 매니악한 콘텐츠 취향을 가지고 있었구나. 이게 무엇인지 설명하기도 어려운 이런 걸 내가 좋아하는구나.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포인트가 무엇인지 설명하기도 어렵다. 아.. 이게 좋고 재미있는데.. 그걸 설명하려면... 음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시작해야 하지??
<데카당스>는 황폐화된 지구-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증강현실 게임이 등장하고, 본체와 아바타의 개념이 존재하며, 세계관의 반전이 있고, 무기력하게 주어진 과업만을 따르던 주인공이 머 의욕 넘치는 조력자를 만나게 되며 각성하고 세계를 전복하고.. 하는 그런 사이버펑크 애니메이션인데.. 그게 또 아니다. 소위 ‘장르적 규칙’을 비틀어 재미를 만들어내는건데.. 그럼 ‘장르적 규칙’을 설명해야 하는데..
여기 나오는 ‘가돌’이라는 정체불명의 존재는 에바의 ‘사도’나 퍼시픽 림의 ‘카이주’랑 비슷하다. 본체가 게임에 접속해 게임 속 현실에서 싸운다는 점에선 매트릭스나 레디 플레이어 원이 생각나기도 하지만 엄밀히는 본체와 아바타 모두가 실재하니 <아바타>에 가깝다고 볼 수 있고, 결국 어떤 플레이어가 그 세계관 자체가 문제인 것을 깨닫고 무너뜨리려 하는 건 자주 변주되던 클리셰고..
근데 변주가 너무 재미있다. 게임은 게임이지만 그게 가상현실이 아니라 레알 옆동네 현실을 다룬다는 것부터 그렇고, 캐릭터들의 본체가 사이보그고 아바타가 인간(!)이라는 점도 그렇고, 본체 디자인이 2D고 아바타 디자인이 실사인 것도 그렇고, 그 세계관의 전복을 총 12회 중 2회 에피에서 다 그냥 까버리고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것도 그렇고, 기존 장르의 법칙이라 얘기되는 걸 죄다 비트는게 너무 재미있다.
이게 아바타 (실사)
이게 본체 (2D)
그걸 생각하다보니 깨달은거다. 어떤 면에선 <에반게리온>을 어떤 면에서는 <퍼시픽 림>을 어떤 면에서는 <모털 엔진>을 어떤 면에서는 <매트릭스>를 어떤 면에서는 <공각기동대>를 생각나게 하는 이 작품은, 아 되게 장르적인 작품이구나. 진입장벽이 꽤 높겠구나. 하다못해 이거 작화가 '어떤 지점에서 <미드나잇 가스펠>을 생각나게 한다’는 말도 되게 매니악한 말이겠구나 하는 그런 걸.
앞선 상황에 최형우가 볼넷을 고르거나 희생플라이를 친다면 안전한 선택일테고 강공으로 간다면 배포가 큰 작전일테며, 어설픈 땅볼을 쳐서 병살이라도 걸리면 최악이지. 근데 거기서 번트를 댄다면 아 이거 좀 재미있는거지. 아 각각의 이유는 있긴 있지만.. 그건 그냥 오랜 기간 야구를 보고 응원하고 욕하며 쌓인 시간 덕에 알게된거지 먼가 공부한 건 아니라 일목요연한 설명을 하긴 어렵다. 그냥 아는거.
그러니 <데카당스>를 보며 생각했다. 아 난 정말 재미있게 봤는데, 이게 왜 좋았는지 이야기하기엔 나의 지식과 역량이 좀 부족한 것 같다, 나는 아마 이걸 왜 좋아하는지 정연하게 이야기하지 못할 것이다. 최소한 에바나 비밥 정도(혹은 그에 준하는 요즘 애니)를 봤던 사람이라면 아마 좋아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그런 ‘만화영화’겠구나. 아 이걸 이해한다는건 꽤 매니악한 일이구나.
최종화인 12화에선 이 거대요새가 끝내주는 액션을 벌인다구요
불특정 다수에게 영업하기 어려운 콘텐츠다. 혹은 이걸 영업한다는 것이 일종의 덕밍아웃이 될 수도 있을 콘텐츠라고도 생각한다. 아 근데 근래들어 세계관도 설정도 주인공 케미도 서사도 작화도 연출도 만족스러운 애니는 드물었다. 솔직히 귀칼보다 낫지 않나.. 누군가 이 글을 읽는다면, 그리고 저 글을 읽고 그럴싸하다 생각이 들어 정주행을 했다면, 우리 진지한 덕 토크좀 합시다. 진심이에요.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운영멤버 뤽
"아 근데 진짜.. ‘아바타 디자인이 실사’라는 말은 내가 썼지만 너무 오덕 같은 것.. 어차피 2D 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