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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로누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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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무시무시한 수준의 라이터스 블락에 짓눌려 있다. 라이터스 블락이란 작가들이 겪는다는 ‘글이 콱 막혀서 더이상 진도가 안 나가는 경우’를 말한다. 이것은 게으름과 창의력 부족과 막막함과 자기 글에 설득되지 않음 등등의 수많은 요소가 겹칠 때 나타난다. 그런데 지금 당장 써야 하는 마감만 하나 둘 셋 넷… 다섯 개다. 망했다. 원래는 듀나와 이산화 작가의 책에 추천사를 썼다는 기쁨에 대한 글을 쓰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 당장 기뻐하기에는 내가 인지적으로 너무 지쳐 있는 상태다. 그러니 이번엔 진짜로 잡상을 쓰겠다.
해리포터의 패트로누스를 생각해보자. 나쁜 감정이 똘똘 뭉쳐서 만들어진 디멘터라는 마법 생물은 오직 엑스펙토 패트로눔 마법으로 소환되는 패트로누스로만 물리칠 수 있다고 한다. 그 패트로누스는 하얀 동물의 모양으로 나오는데, 이 동물은 사랑하는 사람의 것을 닮는다고 한다. 이 어썸한 설정을 롤링은 많이도 써먹었다. 그런데 작중의 패트로누스는 죄다 포유류 인 것 같다. 내가 당장 검색하기로는 초 챙만 조류(백조)다.
좀더 창의성을 발휘해 보자. 패트로누스가 무의식의 상을 구현한다면, 세상에 있는 더 많은 동물들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당장 극을 흥미롭게 끌어갈 수 있는 패트로누스로는 바다에 사는 동물들이 괜찮을 것이다. 심해어, 개불, 멍게, 해삼 등등.
그런데 생각해 보라. 어둠의 마법 방어술 시험 시간에, 모든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내 지팡이 끝에서 찬란한 멍게가 발한다면 그건 꽤나 고통스러운 경험일 거다. 어쩌면 다시는 패트로누스를 소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마음 깊은 곳을 보여주는 건 기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몹시 괴로운 일이다. 라포를 몇 년씩 쌓은 상담가와 정신과 의사에게도 자신의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일이 세상에 많다. 그런데 그런 무의식이 대놓고 반영되는 마법을 다른 아이들이 보는 곳에서 쓰게 하다니!
해리포터 세계에서 정신건강을 아끼는 것이란 서울에서 값싼 역세권 원룸을 찾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일인가 보다.
아니, 어쩌면 옛 정신분석가들 중 마법사가 있었을 수도 모른다. 프로이트가 초상화가 되어 캠퍼스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지도. 그의 이름은 ‘목이 달랑달랑한 프로이트’일 것이다. 왜냐하면 근대가 끝나고 정신분석학에 대한 여러 회의주의적인 맹공이 이어지면서 그의 권위도 목이 달랑달랑해졌을테니까.
여기서 오늘치의 잡상은 끝이다. 왜 내가 지금 라이터스 블락에 꼼짝없이 막혀 있는지 알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정말 망한 것 같다. 망했다는 단어에 너무 이입이 되어서 다른 어휘를 사용할 수가 없는 상태다. 나는 직업을 잘못 택했는지도 모른다. 금요일까지 안전가옥에 장편 챕터 한 개를 다 써서 바쳐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마감을 맞출 수 없을 것 같다.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파트너 멤버 심너울
“살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