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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만 풍기지 않는 것

작성자
헤이든
분류
운영멤버
스토리PD
벌써 몇 해 전입니다. 산문 수업을 들었던 것이요. 저의 기억력은 언제나 문장 하나를 담는 정도에 불과해서 매해 노트를 구입합니다만, 적어둔다 한들 펼쳐보지도 못할 만큼 바쁘게 살다 보면 그마저도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다보면 적어두지 않아도 머릿속에 남아 있는 문장 하나, 말 한마디가 무엇보다 귀하게 느껴져요. 저로서는 그것 하나를 붙잡아 두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산문 수업 이후로 남은 문장은 이거예요. ‘분위기만 풍기지 말자.’
뭐, 당시의 저는 이 문장을 이렇게 이해했어요. 분위기만 풍기는 글이란, 혼자만의 글, 다시 외로워지고 마는 글. 읽는이보다 저 멀리 앞서나가고 마는 글. 냄새만 풍기다가 금세 잊히는 글 같은 것이라고요. 그리고 이 문장은 살면서 맞닥뜨리는 어느 국면마다 다시금 떠올랐는데, 대개 시늉만 하는 나를 발견할 때 혹은 누군가를 마주할 때 이 문장이 나타나 길잡이가 되어 주었습니다.
저는 얼마전에 안전가옥과 재계약을 했습니다. 이전과는 다른 조건으로요. 시간을 쪼개쓰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조금 다르게 살아보고 싶었거든요. 뜬구름 잡는 소리같겠지만, ‘다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은 아주 오래전부터 묵혀왔던 바람 중 하나였습니다.
내년엔 좀 다르게 살거래.
너?
아니, 너.
누가 그래?
있어. 준 점쟁이.
왜 준 점쟁인데?
할머니가 무당이래.
더 물어볼까 말까. 조금 망설이던 끝에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습니다.
… 그래서 어떻게 다르게 산대?
나랑 비슷한 일을 할 거라던데?
이 친구는 수년 째 독립영화를 만듭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저는 영화를 만들거나 그가 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리란 말인데, 어쨌거나 둘 다 제가 해온 일은 아니니 말이 안될 말도 아니었어요. 그리고 작년 말, 우리가 나누었던 우스운 대화는 지금에 와 의미심장한 대화가 되었습니다. 어떤 것은 시간이 지난 후 의미를 얻게되기도 하니까요.
저는 대학원을 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안전가옥에서 일하는 시간이 4일 중 2.5일로 줄었습니다. 애초 뤽이 제게 제안한 것은 1일과 1일의 재택근무 였는데, 고민이 되었습니다. 두 가지 일을 병행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제 이전의 경험을 통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거니와, 어려운 길보다는 수월한 방향을 선택하는 것이 좋지 않느냐는 주변의 우려섞인 조언도 들었으니까요.
하지만 결국 뤽이 제안한 시간보다는 좀 더 시간을 할애하기로 했습니다. 어떤 일은 일정 시간을 쏟지 않으면 ‘잘’ 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 생각해요. 스토리 PD 업무가 그렇습니다. 1.5일을 할애하는 것은 그저 냄새만 풍기는 정도에 지나지 않을 거예요.
내가 잘 하고 싶은 일에 일정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 것. 저는 이것 또한 그 일에 대한 시늉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시간 중에 얼마큼을 기꺼이 이 일에 떼어 놓을 수 있는지, 내 마음의 양을 스스로 가늠해보면, 생각보다 많은 것이 단순해진다는 것을 이번 경험을 통해 다시 배웁니다.
“진지하게 살고 있으면서도 별것 아닌 것처럼.” — <수학의 선물> 중에서
분위기만 풍기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꽉 채워 사는 것. 이것이 저의 올해 바람입니다.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운영멤버 헤이든
"준 점쟁이는 뭐하고 사실지 궁금하네요. 어디서 냄새만 풍기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