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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쇄에 덧붙여

분류
파트너멤버
작성자
심너울
며칠 전에 오랫동안 꿈꾸던 목표 하나를 이뤘다. 《땡스 갓, 잇츠 프라이데이》 재쇄가 확정되었다.
1쇄가 쏠쏠히 팔려서 증쇄를 한다고. 내 삶에서는 처음이다. 마지막이 아니었으면 한다. 흠, 안전가옥 스태프들이 열심히 팔아 주고 도와 줘서 이룰 수 있는 일이었겠지. 물론 내 글이 좋은 것도 큰 이유 아닐까? 음, 좋은 일이니까 몇 마디 쯤은 뒤틀린 자기애를 보이고 싶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데 아직 안 읽으신 분이 있다면 꼭 한 번 시도해 보시라. 그 가격으로 누릴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즐거움이 될 수도 있으니.
1쇄 다 팔린 게 무어가 대단하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럴 때는 도서 시장의 궁핍함을 한 번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종이책을 많이 읽지 않으며, 출판시장이 언제나 불황이라는 건 딱히 이견의 여지가 없는 상식이다. 그 불꽃은 미약하게 타오르고는 있으나 활발한 생명의 기운이 있다고는 볼 수 없다.
물론 웹소설 시장의 성장률은 상당히 아름답지만, 내 분야는 웹소설이 아니니까. 그런 환경에서, 또 코로나로 세계가 지금껏 경험한 적 없었던 위기에 처한 때에 내 책이 잘 팔렸고 그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가 닿았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일종의 기적처럼 느껴진다. 세상에는 재미있는 컨텐츠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그 사이에서 내가 짜낸 이야기를 선택해 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확률적 아노말리 아니면 무엇이겠나.
연락을 받은 그 날은 일단 기분이 좋아서 맥주 한 잔을 했는데, 지금까지 내가 생각한 증쇄의 장면과는 많이 달랐다. 처음으로 증쇄를 하게 되면 하늘에서 별빛이 내게 찬란하게 비치고 이메일로는 청탁이 수십 건씩 쏟아지고 디즈니와 넷플릭스에서 영화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간곡한 요청이 오고 그럴 줄 알았는데(아주 미묘한 과장이 섞여 있다), 음… 그런 건 없었다.
아, 이메일이 오긴 왔다. 내가 이전에 짜서 Github에 올려놓은 코드에 보안 문제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하긴, 많은 인생의 목표들이란 대개 그렇다. 멀리서 볼 때는 너무나 아름다운 어떤 분기점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 그 목표를 지났다고 해서 삶이 극적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뒤를 돌아볼까?
나는 대학에 가면 내가 지금껏 몰랐던 많은 것을 배우고 지식인이 되고 여러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능력을 가질 거라고 생각했다. 꽤 많은 것을 배우긴 했지만 익힌 것은 하나도 없고 지식인은 커녕 여전히 무지렁이에 인정받은 것이라고는 결석으로 인한 F 밖에 없다.
나는 돈을 받고 내 글을 팔게 되면 내 글이 좀더 유의미해지고 그 사실만으로 더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을 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보시다시피 이 꼬라지다.
나는 20대 후반이 되면 사회에 충분히 적응한 생산성 있는 개인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공과세 내는 걸 일주일씩 미루고 있다.
하하, 그렇다. 나는 지금도 새로이 꿈꾸는 목표가 있다. 나는 내 작품이 영화화되는 모습을 보고 싶고, 어쩌면 등단을 기획할 수도 있을 것이고, 심리학을 좀더 깊이 배우고 싶고(대학원 가고 싶다는 뜻이다), 좀 더 많은 돈을 벌고 싶다. 그 모든 것들을 이루면 즐겁겠지. 하지만 그 하나 하나를 이룰 때마다 인생이 완전히 격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내가 가던 방향을 완전히 바꾸지 못할 것이다. 지금껏 생에서 유지하고 있는 관성의 막중한 무게감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삶의 속력과 방향을 극적으로 바꿔놓는 분기점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연금복권에라도 당첨된다면 모를까.
소위 한 탕을 꿈꾸던 예전이라면 모를까, 이제 딱히 절망하지는 않는다. 내가 지금껏 해온 일들은 조금씩 쌓여 나란 사람을 좀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고 있으니까. 내 책이 한 권씩 더 팔릴 때마다, 내가 쓴 글이 하나씩 더 쌓일 때마다, 나는 어제보다 더 나은 작가가 되고 있고 내가 되고 싶은 사람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당장 2년 전에 용돈벌이를 하려고 서교예술실험센터 공모전에 낼 글을 쓴다고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을 때는 내가 증쇄라도 할지 꿈도 못 꿨겠지. 그러나 그 순간에 그 일을 하고 용돈을 벌었기 때문에, 그랬기에 글을 조금씩 하지만 꾸준히 쓰게 되었고 어쨌든 지금 증쇄라는 - 타인에게는 작은 성취일 언정, 나에게는 주요한 한 마일스톤을 지나지 않았겠나.
그래, 장기적으로 보자. 생각보다 인생은 길다. 따지고 보면 이제 4분의 1쯤 살았는데, 더 많은 재미난 일들이 일어나지 않겠나. 뭐, 그래도 내 책을 유명한 아이돌이 읽고 인스타그램에 인증해서 갑자기 판매량이 300% 상승하는 꿈을 포기할 수는 없겠지만. =)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파트너 멤버 심너울
“독자 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