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ly in my life 라는 말은 영국 드라마 <미란다>에서 발견한 표현이다. 영미권 드라마에서는 이전 화 또는 이전 시즌을 요약할 때 (내가 요새 한창 열심히 보고 있는 <굿 플레이스>를 예로 들면) 흔히 Previously in The Good Place… 라는 표현을 쓰는데, <미란다>는 미란다라는 인물과 그 주변인들의 일상 우당탕 에피소드들을 그리는 작품이어서 미란다가 “그동안 제 삶에는 이런 일이…” 라고 하면서 시작하는 것이다… 한동안 일기 쓰기를 미루다가 갑자기 몰아 쓰게 되었을 때 종종 이 관용구를 제목으로 삼는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한 달 동안 서련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라는 뜻입니다. (미란다 오프닝 시그널 송을 틀어주세요)
> 이사한 지 이제 만 1개월이 되어간다. 그간 이 집에는 포장이사 업체 기사님 세 분과 가스 검침원 분과 정수기 설치기사님과 LG U+ 기사님과 모친과 나의 친구 여섯 명과 거대한 바퀴벌레 두 마리(무슨 수사가 아니라 진짜로 바퀴벌레가), 그리고 세스코 기사님이 방문했다.
세스코 기사님은 다른 기사님과 구분하여 Knight라고 써 드려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여러 의미에서 그런 생각이 드는데, 이 얘기는 여러분의 비위를 위해서 안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렇지만 새 집이 바퀴벌레 소굴로 오인될 수도 있으니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세스코 기사님이 (내가 찍은 바퀴 사진을 보시더니) 이런 바퀴는 절대로 집 안에서 살 수 없다고 했다. 안심 또 안심.
> 10월 한 달 간의 소비 중 가장 만족스러운 것은 온수매트. 제일 후회되는 소비는 전기온열매트. 그러니까 온수매트도 샀고 전기온열매트도 샀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일어난 일과 나의 감정변화를 시간순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내 침대 사이즈가 슈퍼싱글 사이즈니까 대충 맞겠지, 침구류는 대체로 사이즈가 통일되어 있는 편이니까, 하고 슈퍼싱글 사이즈 전기매트를 먼저 주문했다. 도착해서 개봉해본 물건은 내 침대 가로 너비보다 10cm가 더 넓었다… 그리고 설명서의 취급주의란에 전기매트를 접거나 침대보 밑으로 밀어넣어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었다. 나름대로 고르고 고른 양품인 데다 저렴하게 잘 산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건만, 막상 펼치고 보니 한쪽이 항상 뜨거나 접혀있어 함부로 켤 수도 없고, 이미 펼쳐서 침대에 깔아본 다음인지라 환불 요청을 하기도 애매한 것 같고… 즉 꽤 잘 산 한편 엄청나게 잘못 샀다는 모순을 뼈아프게 느끼던 중에, 공장제조 양품 크라우드 펀딩 업체에서 온수매트 매물을 발견한 것이다. 그간 내가 이 업체를 통해 산 물건은 (현 안전가옥 사무실과 같은 공유 오피스에 있는) 동구밭 설거지 비누와 샴푸바 정도가 전부였지만 난 나를 믿었었던 만큼 이 업체도 믿었기에 온수매트 펀딩에 망설임 없이 참여했고 이 소비가 아주 만족스러웠던 것이다.
청소년기에는 모친이 생활용품 방문판매업에 종사하는 지인을 통해 장만한 옥장판과 함께 겨울을 났고 성인이 되어서는 주로 전기온열매트를 사용해 왔기에 겨울마다 은은한 두통과 목이 찢어지는 듯한 갈증과 함께 깨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 왔다. 처음으로 직접 전기온열매트를 샀을 때 (4년 전이다) 허 전기온열매트라는 물건은 이렇게나 저렴하구나 했던 기억도 문득 떠오르고… 아무튼 아무리 전자파를 잡았다고 해도 작동원리상 인체에 온기와 함께 미묘한 악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는 전기온열매트와 달리 온수매트는 두통도 갈증도 내게 주지 않았다.
요새는 온수 온도를 39도 정도로 설정하고 자는데 자리에 누울 때마다 배나 등이 넓고 평평한… 즉 나보다 훨씬 덩치가 크고 체온이 약간 높은 어떤 짐승의 품에 안기거나 업혀서 자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온수매트가 인체에 열을 전하는 원리는 혈관에 피를 돌리는 것과 매우 유사한 방식일 것이어서 이 느낌이 아주 큰 착각은 아닐 거라는 믿음도 있다… 온수가 매트 속의 미세한 관을 채울 때 뭐랄까 “꾸르륵~?” 하는 소리가 나서 더더욱 그렇다.
한편 아무래도 잘못 산 것 같다는 전기온열매트는 우리집에서 뭘 하고 있냐면 바닥에서 러그인 척 하고 있다. 그 위에 좌식 테이블을 두고 보드게임을 하면 친구들이 덥다고 한다. 나는 원래부터 이러려고 전기온열매트를 산 척 한다.
> 10월 한 달간 유튜브나 인스타 라이브에 몇 번 나갔다. 한편 올해 단행본을 낸 친구들, 평소 내가 관심있어 하던 작가님들도 인스타 라이브를 촬영해서 10월에는 출연자로서도 시청자로서도 참여할 기회가 많았다… 고 할 수 있겠다. 궁금한 점은 이것이다: 시청자일 때는 너무 재미있는데 출연자일 때는 뭐가 뭔지 모르겠어서 아무말 페스티벌을 벌이는지라 내가 출연한 클립들도 이만큼 재미있을지 잘 모르겠다… 는 것. 영상물은 아무래도 모니터링하기가 쑥스럽기도 하고,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모니터링을 해도 나한테는 내가 하는 모든 말이 그냥 내가 원래 평소 하던 말로 들려서 재미고 뭐고, 역시 잘 모르겠다…
> 구스타프 칼 융의 이론? 이라고 해야 할까 개념… 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런 것들 중에 “동시성(synchronicity)”이라는 것이 있다고 들었다. 이 앉은 자리에서 그냥 인터넷 검색으로만 알 수 있는 정보를 조금 다듬어 보면 의미있는 우연의 연속/결합과 그것이 인간의 의식을 자극하는 방식을 이르는 개념인 것 같다. 융이 어떤 내담자에게서 전날 밤 황금 풍뎅이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마침 그때 풍뎅이 한 마리가 닫힌 창 안으로 날아들어오려 하며 창을 두드렸고 융은 내담자에게 저런 풍뎅이 말인가요, 라고 했다는… 그런 일화가 있다고 한다. 이 일화와 개념을 소개하고 있는 블로그들이 대부분 사주 명리 타로 분야에 특화되어 있는 곳들이었던지라 학술적으로 어디까지 유효하게 보아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한다.
이 긴 얘기를 왜 했냐면 나도 소설이 발표된 시점의 현실과 내 소설의 내용이 의미있는 우연으로 연결되는 경험을 종종 하기 때문이다. 가령 평양 출신 주인공이 나오는 첫 장편을 공모전에 투고하고 결과를 기다리던 사이에 남북 최고지도자의 대면을 생중계로 보게 된 것이라든지… 가장 최근의 예를 들면,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경영계의 거인이 숨을 거둔 그날은 나의 “안전가옥xㅇㅇㅇㅇㅇ” 컬래버레이션 원고 마감일이기도 했는데, 내 소설에도 어떤 재벌 남성이 죽는 내용이 나오는… 그런 식이다.
물론 읽는 이들에게는 별 것 아닌 우연으로 보일 법한 작은 충돌들인 것을 안다. (혹은 인정한다,라고 해야 할까?) 그렇지만 소설을 쓰는 동안 실제-현실세계보다는 소설 속의 세계에 더 오래 몰입해있게 마련인 작가에게는 이 동시성이 그렇게 하찮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도리어 그 속성에 집착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소설가적 자아의 나쁜 습성 중 하나일 것이다.
> 9월에서 10월 사이 독자와의 만남을 가질 때마다 듣는 차기작에 대한 질문에 나는 (이미 집필이 예정된 작품들이 있지만 그것들을 제외하면) 여성 코미디언들에게 관심이 많다는 답을 해 왔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 내가 정말 좋아하던 여성 코미디언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위에서 열심히 설명한 동시성… 이론… 같은 것으로 이 일과 저 일 사이의, 그러니까 나의 소재적 관심과 실제로 일어난 사건 사이의 연관을 밝힐 수는 없고, 그러려는 시도 자체가 사실… 매우 무례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 글을 쓰게 만든 것이 바로 이 심리인 것 또한 정확하게 인지하여야 한다. 균형을 잡기가 정말 어렵다.)
대신에 이런 식으로 말해볼까 한다: 나는 여성 코미디언 세계에 정말 관심이 많다. 여성 코미디언들의 활약을 인정하고 (새삼스럽지만) 장려하는 요사이 방송계의 새로운 흐름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겠지만, 나의 관심은 좀더 오래되고 본격적인 것이었다고 나는 믿고 싶다. 나는 개그콘서트 1회의 김미화를 기억하고, 김미화가 김진숙에게 연대한 것을 기억한다. 팔도모창가요제라는 명절 파일럿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데뷔한 조정린과 박슬기가 시트콤의 전성기에 어떤 식으로 활약했는지를 기억하고 그리워한다. “막돼먹은 영애씨” 김현숙이 출산드라 캐릭터로 활약하던 시절 한 초등학생으로부터 “덕분에 비만이라고 놀림당하지 않고 축복 받았다고 부러움을 받는다”는 팬레터를 받았다는 에피소드를 좋아한다. 무다리와 껌딱지 가슴을 소재 삼던 시절을 지나(정말 우리는 그 시대를 지났을까?) ‘배운 개그'를 시전하던 박지선을 좋아했다. 여성 코미디언들에 대한 나의 마음은… 오랜 친구에 대한 마음과 비슷하다. 완전한 사랑이나 지지만이 아니라 그때 왜 그랬냐고 묻고 싶은 원망과 미움이 항상 섞여있는 마음 말이다. 박지선에 대해 특히 그랬던 것 같다. 박지선은 출연한 코너마다, 연기한 캐릭터마다 유행어를 만들어낸 유능한 개그우먼이었지만 봉숭아 학당처럼 ‘떼거리'로 나와서 캐릭터성을 자랑해야 하는 코너에서는 다른 사람들처럼 자기 외모를 웃음거리로 삼는 방식으로 개그를 했다. 한편 그건 ‘다른 사람들처럼' 한 것이 아니기도 했다. 개그계에서는 유니크한 외모를 ‘이용’하지 않는 것이 일종의 낭비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박지선의 박지선됨을 정말로 잘 드러내는 방식인지가 늘 의심스러웠다…
이 원망을 함부로 밖에 꺼내놓지 않는 까닭은 그들의 생존 방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비난하는 것에 그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았을까. 무엇과 싸우고 있었을까.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러나 짐작만 가능한, 한편으로 짐작하는 것마저 실례가 아닐까 싶은 어떤 것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만이, 이제는 분명해졌는데, 그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이 무척 괴롭고 아프고 죄송한 마음이 든다. 그러니까 이 또한… 이상하게도 친구들에 대한 마음과 비슷한 것 같다.
멋쟁이 희극인 박지선 님의 명복을 빕니다.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파트너 멤버 박서련
“이외에도 많은 일이 있었고 따라서 하고 싶은 말은 아주 많으며 모두 아프거나 슬픈 일들만은 아니었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