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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디언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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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가디언 멤버 OU
*경고: 설마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매트릭스> 3부작을 안 본 분은 없으리라 생각됩니다만, 매트릭스의 주요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을 미리 말씀 드립니다.
와인을 좋아하다 보면 영화에서 유명한 와인이 나오면 괜히 반갑고, 유난히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그러다보니 <매트릭스: 리로디드>에서 중간 보스쯤으로 나온 메로빙지언이 ‘비단으로 엉덩이를 닦는’ 것 같은 느낌의 프랑스어를 하며 오브리옹 59년산-보르도 최고 와인인 5대 샤토 중 오브리옹의 역사적인 그레이트 빈티지-을 마셨던 것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굉장히 좋은 와인을 마신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메로빙지언은 이쁜 아내를 두고 랜덤한 여성에게 최음제를 보내 바람이나 피우는 한심한 인간-프로그램?-이었을 뿐인데, 최근 다시 보다보니 그가 네오 일행에게 설파한 철학이 꽤나 중요한 내용이었구나 싶다.
메로빙지언은 세상 모든 것을 지배하는 제1원칙은 원인과 결과로, 모피어스가 얘기하는 선택조차도 모두 어디선가부터 시작한 원인에 따른 결과이며, 작용에 따른 반작용에 불과하다고 비웃는다. 그러고나서 아내 페르세포네의 뒷통수와 네오의 압도적 무력에 발려서 결국 애지중지하던 키메이커를 뺏긴 메로빙지언은 그대로 호구화됐지만, 이후 3편의 주요 장면들을 통해 네오, 모피어스 모두 오라클과 아키텍트의 게임판 위에서 놀아난 장기말이라는 게 드러난 걸 보면 메로빙지언의 말이 틀린 것이 없었다.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가 나오냐면, 지금까지 자유인처럼 내달려온 내 인생이 알고보면 복잡다단한 인과관계에 얽혀있었던 사실을 깨달았고, 원인에 대한 충분한 고려 없이 저질러버린 결과들이 고스란히 빚으로 돌아오고 있는-비유적으로나 실제로나-상황이기 때문이다.
통상적인 진로를 벗어나서 ‘자유인’ 행세를 시작한 것이 2008년 말이었으니, 12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은 무척이나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산다고 믿었다. 심지어 항상 그런 자유를 누리면서도 더 자유로울 방법이 없을지 끊임없이 고민하며 열정과 희망과 비전을 찾아 헤매고 일을 벌려왔던 것이다.
다행인 것은 어려서부터 읽어온 책들로부터 얻은 약간의 미래지향적 사고와, 그걸 자유롭게 적용할 수 있었던 유연한 상황과, 그리고 마침 뜻을 이해하는 훌륭한 팀이 있어서 대책없이 일을 벌린 것치고는 중간중간에 성장통은 있었을 지언정 대부분은 유의미한 결과를 맺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어느덧 정신을 차려보니 이 ‘유의미한 결과’들은 모두 어마어마한 비용을 요구하는 오퍼레이션들이고, 이걸 계속 유지할 자원은…몹시 한정적이란 것을 새삼 깨닫고 있다.
지난 12년 마음껏 누린 자유와, 그를 통해 만들어낸 아름답고 임팩트풀하지만 고비용 덩어리인 나의 유산(?)이라는 원인은, 개념적이며 동시에 아주 실존적인 빚더미라는 결과로 귀결되었고, 그 덕에 나는 당분간 나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들에는 눈도 못 돌리고 열심히 로동하는 인간이 될 예정이다. 그리고 그 말은 월간 안전가옥도 무기한 연중에 들어간다는 거고…
좋아하던 일에 매진하던 결과 좋아하는 일을 쉬어야 한다는 이 아이러니함이 다소 슬프긴 하지만, 동시에 그게 어른이 되는 과정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주변 선배들이 주택담보대출을 받아 은행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기 시작해야 본격적으로 어른의 삶이 시작된다고 했는데, 나도 정확히 그런 상황이 아닐까. 아무쪼록 36살부터 시작한 어른의 삶이 내가 두려워하는 것만큼 회색빛이 아니기만 바라며, 언젠가 빚더미라는 원죄에서 해방되는 날만을 기다린다.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가디언 멤버 OU
"과거의 방종이 원인이 되어 제게 나타난 결과가 또 하나 있으니, 바로 중심성 장액성 맥락 망막 병변이라는 기나긴 이름의 안구질환입니다. 특별한 원인이 밝혀지진 않았지만 스트레스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고, 그 때문에 기존에 비하면 극단적인 수준으로 음주를 제한하고 있는(차마 금주는 못하고) 상황입니다. 이래저래 젊은 날의 치기와 패기(?)의 대가를 치르고 사는 어른이 되가는 하루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