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earch
📽️

<윌 앤 그레이스>의 카렌 워커

분류
가디언멤버
작성자
OU
Written by 가디언 멤버 OU
아나스타샤 비버하우젠!
‘다시 태어나면 얘로 살겠다’는 이번 월간 안전가옥의 주제를 받아 들고 워드를 열고는, 한참이나 고민하고 망설이는 나를 발견했다. 내가 좋아하던 여러 가지 캐릭터들을 찬찬히 살펴봤을 때 그들을 매력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별개로, 과연 내가 저렇게 살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선뜻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편에서 매력적인 캐릭터로 언급했었던 <피를 마시는 새>의 치천제도,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말레피센트도, 카리스마가 넘치건 뭐하건 상관없이 그들의 인생 자체는 고난이었고 끝은 처절했다. 아무리 겉으로는 멋있어 보일 지언정 내 속이 끓어 문드러지는 삶은 그닥 당기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는 대부분 내가 매력적으로 느끼는 다른 캐릭터들에게도 적용 가능한 얘기였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캐릭터들도, 디즈니의 캐릭터들도, 마블이나 DC의 캐릭터들도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사람들은 그에 준하는, 혹은 그 이상의 고통과 짐을 얻고 사는 이들이었다. 아니면 매일매일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쟁터이거나.
이렇게 저렇게 거르다 보면 그나마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되고 싶은 캐릭터는 가끔씩 하이틴 로맨스나 정치물에 등장하는, 수상쩍은 권력과 자원을 지니고 막후에서 활약하면서 등장인물들을 도와주는 어둠의 실력자(?) 캐릭터들인데, 너무나 클리셰인 나머지 어느 작품의 누구를 지정해야 할 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문득 ‘다시 태어나면 얘로 살겠다’라는 질문에 섣불리 대답하지 못 하는건, 혹시나 내가 그만큼 현재 나의 삶에 만족하고 있어서일 수도 있겠다는, 다소 불경한 생각이 들었다. 넉넉한 자원과, 이슈가 없지는 않지만 대체적으로 화목하고 건설적인 가족 관계와, 언제 만나도 즐거운 좋은 친구들과, 가끔 너무 과해서 피곤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상과 목적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동료들까지.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전세계가 묵시록적 종말로 나아가고 있는 와중에 그나마 일말의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는 나라에서 누리고 있으니 무슨 불만이 있을까.
그러고보면 불만이랄지, 아쉬움이랄지 없는 것은 아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불만인 부분을 두가지를 꼽자면, 하나는 지나치게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착한 사람’의 덫에 빠져 점점 더 다른 이들의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으려는 악순환에 이미 빠져버렸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무모하고 불 같은 욕망(?)의 시절을 보내지 못 했다는 점이었다. 준 익명성을 무기로 과감히 고백해 보자면, 현재 내 인생의 서사는 지나치게 청소년관람가능의 다큐멘터리가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런 면에서 봤을 때, 불현듯 다시 태어나면 이 사람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캐릭터가 떠올랐다. 뉴욕 최고 부호 중 하나이며, 사교계의 악동이고, 풍만한 매력과 패션 센스를 한껏 자랑하고, 거리낌 없는 독설과 폭력(?)으로 원하는 것은 무조건 획득하며, 그 와중에도 소중한 사람들에게 충실하고 좋은 친구들을 만나 유지하는-내 인생이 다큐멘타리라면, 이 사람은 개그 콩트인(실제로도 그렇지만) 그런 사람이 있었다.
미국 NBC 드라마 <윌 앤 그레이스>의 카렌 워커.
게이 드라마계의 프렌즈라고 불리는 <윌 앤 그레이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캐릭터가 ‘카렌 워커’였다는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실제로 그 때문에 주연인 ‘그레이스’를 연기한 데브라 메싱이 ‘카렌 워커’역을 맡은 메간 멀러니를 대놓고 싫어했다는 것도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고.
뉴욕의 수상쩍은-얼굴은 한번도 안 나온-스탠리 워커의 훨씬 젊은 부인이며, 가끔씩 아나스타샤 비버하우젠이란 가명으로 사교계 명사에 어울리지 않는 모험들을 일삼는 카렌 워커는 내게 길티 플레져 그 자체였다. 꼭 그녀의 악행들-인종차별 발언을 일삼는다던가, 성희롱 덩어리라던가, 고용인들을 아무 이유 없이 괴롭히고 해고한다던가…이 리스트는 끝이 나지 않는다-을 따라하고 싶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아무의 눈치도 보지 않고 본인의 욕망에 충실하게, 그리고 스타일리쉬하고 화려하게 따르는 카렌 워커의 삶은 다시 태어나면 한번쯤, 혹은 몇번쯤 살아보고 싶은 인생이었다.
여기서 또 한가지 생각이 드는 것은, 물론 작중에서 카렌 워커의 나이는(비록 비밀이지만) 추정컨대 40대 중후반 이상인지라, 나도 나의 반생을 카렌 워커처럼 살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굳이 내가 다시 태어나는 어마어마한 난관을 거쳐야만 카렌 워커처럼 살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을까, 란 다소 무서운 생각을 해보게 된다.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가디언 멤버 OU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카렌 워커는 시즌 3-4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로는 너무 폭주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뉴 시즌에서는 대놓고 트럼프 지지자로 나와서…왜 미국 드라마는 박수 칠 때 떠나지 못하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