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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벼락을 내리소서

분류
파트너멤버
작성자
이산화
지난 6월 29일 정의당의 장혜영 의원이 성별, 나이, 장애,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 등에 대한 모든 영역의 차별 금지를 골자로 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대표 발의하였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사람의 숙원이었고 또 지난한 투쟁의 대상이었던 법안이 이번에야말로 법전에 명명백백히 새겨지고자 다시 한 번 링에 오른 셈이지요. 왜 지난한 투쟁이 필요했느냐 하면, 바로 그 법안이 통과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을 숙원이자 투쟁의 목표로 삼아 온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퀴어 축제가 열리는 곳 주변에서 의미불명의 부채춤을 추고, 퍼레이드를 막아서고, 갖가지 조잡한 플래카드를 걸어놓은 차 위에서 연신 "호모섹슈얼리티 이즈 신 컴투지저스"를 외쳐대던 바로 그 사람들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반대 청원과 항의전화 총공세를 시작했다고 하네요. 저는 어디 전화 걸 일이 있을 때마다 긴장이 돼서 매번 머뭇거리는데, 그분들은 어떻게 국회의원한테도 그렇게 서슴없이 전화를 걸 수 있나 모르겠어요. 사자굴에 들어간 다니엘의 용기가 그와 같았을까요.
아마 그분들 중 몇몇은 정말 목숨을 걸고 절박한 항의 투쟁을 벌이고 계실 겁니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학교에서 동성애를 가르치고 목사가 동성애 반대 설교를 할 수 없게 되고(중략)불벼락이 떨어져 대한민국이 삽시간에 불지옥으로 바뀔 거라고 믿으면서 말이지요. 2년 전쯤 참여했던 퀴어 퍼레이드도 대략 불지옥으로 근사할 수 있을 만큼은 더웠지만, 그래도 나라가 진짜 불지옥이 되면 곤란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그분들의 열정도 이해가 아주 안 되는 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의 믿음 체계 속에서는 사람들이 좀 더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용서할 수 없는 도덕적 타락이고, 또 사회에 도덕적 타락이 쌓여서 일정 수치에 다다르면 사회를 통째로 무너뜨릴 드라마틱한 재난 이벤트가 발생하게 되어 있는 것이지요. 짐작컨대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소돔과 고모라 에피소드가 그 초자연적 믿음의 뿌리일 테고요. 죄악이 너무 만연하였기에 신이 하늘에서 진짜로 유황불을 뿌려 멸망시켰다는 내용의,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망태기 할아버지나 소가 된 게으름뱅이 이야기쯤 될 흔한 도덕 우화 말이에요. 글쎄요, 정말로 자연재해를 피하고 싶다면 애매한 타락 수치보다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를 더 관리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한편 어떤 사람들에게는 소돔과 고모라에 떨어진 불벼락이 일종의 비유입니다. 타락한 사회는 참담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으며, 지금 눈앞에 닥친 무슨무슨 법안 따위가 바로 그런 붕괴를 불러올 타락이라고 믿는 것이지요. 이 법이 통과되면 교회가 게이바에 팔린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사회를 장악한다! 비수술 트랜스젠더가 여탕에 밀려들어온다! 이런 가상의 불벼락 레퍼토리들은 실제 법안과 논리적 연결성이 거의 없다는 점에선 진짜 불벼락과 별로 다를 것도 없습니다. 결국 극단적 수사법의 불기둥 속에서 어른어른 비쳐 보이는 것은 사회의 타락이 아니라 발언자의 마음 속에 똬리를 튼 추악한 혐오일 뿐이고요. 만일 우리 사회가 무너진다면, 그건 개인의 여러 정체성을 존중하려는 사상 때문이 아니라 그 정체성에 대한 억압의 자유를 더더욱 존중하겠다는 자들 때문일 것입니다.
차별금지법 이야기는 사흘 밤낮 내내 할 수 있지만, 설교가 길어지면 성도들은 잠들게 마련이므로 슬슬 성경말씀을 묵상하고 마칠 때가 되었네요. 구약성서에 따르면 롯과 그 가족들은 소돔에서 유일하게 도덕적인 인물이었고, 그 때문에 불벼락을 피해 도망쳐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19장 26절에서 롯의 아내는 도망치던 중 뒤를 돌아보았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맙니다. 여러 설교자들은 전통적으로 이 구절에서 롯의 아내가 세속적인 것들에 집착하는 허영심 많은 여인이었으리라는 가정을 읽어내 왔지요. 하지만 정말로 롯의 아내는 두고 온 재물이 아까워 고개를 돌렸을까요? 소돔은 범죄자와 악인으로 우글거리는 도시였지만 그래도 그곳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구약성서의 전능한 신은 그들을 귀찮게 죄악으로부터 구원하는 대신 간편히 불태워 죽이는 길을 택했고요. 차별금지법에 '형이 실효된 전과자에 대한 차별'이 명시되어 있다는 이유로 한바탕 쏟아진 또 한 갈래의 비판들을 보며, 저는 롯의 아내가 소금기둥이 되었던 것을 생각합니다.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파트너 멤버 이산화
“SF 작가. 종교는 없지만 전도서 3장 19절을 가끔 묵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