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earch
🍦

죽은 별난바의 소생

작성자
이산화
분류
파트너멤버
집 근처 편의점과 마트에 매일 들러서 새로 들어온 간식거리가 있는지 확인해보는 것이 요즘의 일과입니다. 가장 눈여겨 보는 코너는 아이스크림이에요. 주변 편의점들의 아이스크림 라인업이 상당히 빈약한 것은 언제나 불만입니다만, 그래도 가끔씩은 꽤 재미있는 제품이 눈에 띄곤 합니다. 두부 아이스크림은 괜찮았어요. 쌀맛 컵 아이스크림은 좀 별로였고요. 가장 최근에는 'The Heart of Darkness'라는 이름이 붙은 진한 다크 초콜릿 맛 아이스바를 먹었는데요, 겉부분에 빨간 입술 무늬까지 그려놓아서 성숙하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할 작정이었던 것 같지만 굳이 저 상품명이어야 했을까요? '암흑의 핵심'이나 '지옥의 묵시록' 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하지만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제가 사 먹긴 했으니 마케팅의 승리인 셈입니다. 무서워라, 무서워라!
이처럼 생전 처음 보는 신제품이 있는가 하면, 한때 단종되었다가 과거의 아득한 심연 속에서 도로 기어나온 제품도 있습니다. 2006년에 출시된 과일맛 아이스바 '과수원을 통째로 얼려버린 엄마의 실수'가 이름 앞에 '돌아온' 한 마디 붙은 채로 아이스크림 매대 안에 쌓여있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2006년과 비교했을 때 맛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비교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당시에 이 아이스크림을 먹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아니면 기억이 안 나기 때문에) 돌아오신 어머님이 정말로 14년 전 그때 그 어머님이 맞는지 확신하지는 못했습니다. 어쩌면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단 생각도 드네요. 작년에 출시된 '돌아온 별난바'는 막대사탕도 없고 피리를 불 수 있는 막대도 없이, 초콜릿 속에 파핑캔디가 조각난 추억의 잔해처럼 묻혀있을 뿐인 꼬락서니였으니까요. 피리를 불 수 없는 별난바를 도대체 왜 만든 걸까요? 다음엔 뭐죠? 껌 없는 알껌바? 치즈 안 들어간 치즈위즈? 둘리가 안 그려진 호이호이? (기억에 없으시다면 조용히 지나가세요)
네, 과거에 즐겨 먹던 아이스크림이 잘못된 모습으로 돌아오는 건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는 일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더 두려운 생각도 드네요. 돌아온 과수원(중략)실수와 돌아온 별난바가 더 거대하고 막을 수 없는 어떠한 사회현상의 전조는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청포도맛 도깨비방망이, 쿠키닷컴, 국찐이빵처럼 낡디 낡은 망자들의 귀환을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지난 몇 년 동안 나온 블록버스터 영화들 중에 얼마나 많은 작품들이 옛날 만화와 게임과 프랜차이즈의 각색이었는지를 떠올려 보자는 거죠. 영화 <소닉>의 개봉과 별난바의 귀환 사이에 정말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걸까요? 십 년 뒤의 찬란한 미래 세계란 <반지의 제왕> 리부트 영화를 보면서 스타크래프트 과자 리마스터판을 아작아작 씹어먹는, 다시 말해서 미래라기보단 그냥 해상도를 높인 과거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 아닐까요?
이 모든 불길한 걱정이 그저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는 이따금씩 우리 모두의 창의력이 무덤 속에서 기어올라온 추억이란 이름의 좀비들에게 매몰된 채 끊임없이 열화 복제의 복제만을 거듭할 뿐인 형태의 문화적 디스토피아를 상상하곤 합니다. 생각을 바꾸고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고통스러운 작업인 반면, 추억은 언제나 익숙한 안정감을 가져다주게 마련이니까요. 어쩌면 지금은 별난바가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랄 때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기억 속의 별난바보다 나은 아이스크림을 생각할 때일지도 몰라요. 설령 우리가 즐거웠던 과거로부터 너무 멀리 나아가 버려서, 다시는 별난바 막대기의 피리 소리를 영영 듣지 못하게 된다 해도요. 다시 말해 별난바 안에 갇힌 사탕의 잔해는 죽은 자의 혼이 현세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 이별의 결의를 담은 메시지인 셈입니다.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파트너 멤버 이산화
“SF 작가. 단종된 과자 중에서는 와클을 제일 좋아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