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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강철의 연금술사> 실사판에서 <타샤 튜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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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샤튜더
강철의연금술사
출처: CGV

얼마 전 <타샤 튜더>를 봤어요.

동화작가이자 삽화가인 타샤 튜더를 일본인 감독 마츠타니 미츠에가 취재를 맡아 찍은 다큐멘터리였죠. 90세가 넘은 노령의 동화작가가 자신의 정원을 돌보고 귀여운 코기 강아지와 하루하루를 보내며 인생의 지혜를 나눠주는 그런 영화였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내적으로 비명을 질렀지요. ‘아니, 이 영화는 완전히 <강철의 연금술사> 실사판 그 자체잖아!’라고요.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강철의 연금술사> 실사판 진짜 망했죠. 아라카와 히로무 원작의 걸작SF만화 <강철의 연금술사>가 영상화 계획이 발표되었을 때 모든 사람들이 이 영화는 망할 게 뻔하다고 예상했고 실제로도 망했습니다. 금발에 벽안이었던 백인 캐릭터들을 일본에서 태어난 아시안들이 금발로 염색해 이탈리아 로케에서 연기를 하며 촬영을 했는데, 온통 위화감 투성이었거든요.
뭐 일본 영화 중 만화 원작을 억지로 실사화를 했다가 망한 작품이 <강철의 연금술사> 실사판만 있는 것도 아니죠. <죠죠의 기묘한 모험>도 해외 로케로 찍었다가 쫄딱 망했고 <테라포마스>나 <데빌맨>도 비슷하게 망했죠. 일본에는 만화 원작으로 영화를 만들 때 꼭 이런 일이 일어나고는 해요.
<암살교실> 실사판에서도 한국의 아이돌 그룹 카라의 강지영이 금발로 염색한 뒤 러시아인으로 나오기도 했을 겁니다. 일본에서 찍은 영화에 한국 아이돌이 출연해서 러시아인이라고 주장하고 그게 영화 안에서는 당연히 받아들여지는 그런 괴상한 풍경은 일본이 아니고서는 그 어디에서도 보기 힘들 겁니다, 정말.
<타샤 튜더>는 위에 나열된 영화들과 다르게 다큐멘터리예요. 거기다 일본인은 등장하지도 않고 오로지 미국인들이 미국의 이야기만 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실사 영화, 그중에서도 흥행에 실패하고 흑역사로만 남은 작품들이 떠오른 건 이 작품들이 모두 만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만들었기 때문이에요.

“얘가 만화만 보고 앉았더니 만화와 현실도 구분하지 못하고!”라는 비판은 오타쿠들 사이에서는 터부나 다름없는 지적이었죠.

강철의 연금술사 (출처: 네이버 영화)
왜냐하면 만화를 보지 않는 사람들, 만화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저런 말을 자주 했거든요. 이 말은 만화가 가진 잠재력, 폭넓은 가능성이 열려있는 예술로서의 성격을 무시하는 말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만화 원작을 실사로 옮기며 실패한 작품들에 대해서는 저 문장을 그대로 적용하고 싶어요. 만화니까 가능한 연출이 있어요. 그리고 만화니까 가능한 연출을 실사영화로 옮길 때는 일정 이상의 각색이 필수적이에요. 그런데 이 각색의 필요성을 인지하지 못하면, “얘가 만화만 보고 앉았더니 만화와 현실도 구분하지 못하고!” 이상한 작품만 만들어버리니까요.
일본에서 제작한 만화 원작 실사 영화들 중 대다수는 이렇게 가상과 현실 사이의 구분을 두지 않고 가상의 이미지에 대해 너무나도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지요. <바람의 검심> 실사판처럼 원작부터가 과잉된 가상의 이미지를 요구하지 않는 경우나 <은혼> 실사판처럼 아예 막나간다 싶을 정도로 가상의 이미지를 살려버리는 경우라면 모를까, 많은 작품들이 여기서 균형점을 잡지를 못하고는 해요.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실사 영화들은 만드는 사람들이 이 작품을 찍기 위해 평소보다 더 가상의 이미지에 몰입을 해야 하고 보는 이들에게도 그만큼의 과한 몰입이 요구되지요. 가상의 이미지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동양인 배우가 금발로 염색을 하고 서양인이라고 우기는 현실을 최대한 잊어야만 한다는 큰 장벽을 갖고 있으니까요. 이 작품들은 말 그대로 창작자와 수용자 모두에게 “만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도록” 요구하는 셈이에요.
고백하자면 저는 이런 작품들을 크게 비판할 생각은 없었어요. 업계 내부의 사정이라는 것도 있고 투자자들이 제작 단계에서 과도하게 간섭을 하는 상황에 작품을 만들기에 좋은 요소보다는 기획서를 통과시키기 좋은 요소들-유명 배우 등장, 인기 만화 원작-에 더 집중을 하고 중간에 여기저기 돈을 떼어먹기 좋은 요소-해외 로케-마저 더해야 하니 이 작품들이 아무리 실패하더라도 그 작품들 자체를 비판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었거든요. 정확히 말해 “만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사정 상 “만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않은” 것에 가까웠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하다못해 실제 서양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다큐멘터리로 촬영한 <타샤 튜더>에서 마저 이런 “만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내용으로 가득한 작품을 보고 있노라니 아, 이정도로 가상의 이미지에 집착하는 건 투자와 기획 이상의 문제구나, 정말 좀 문제가 있구나, 싶어서 낙담을 하게 되더라고요.

정답고 착하며 전통문화를 잊지 않은 동화작가 할머니, 타샤 튜더

앞서도 간략히 설명했지만 <타샤 튜더>는 동화작가이자 삽화가인 타샤 튜더를 일본인 감독 마츠타니 미츠에가 취재를 맡아 찍은 다큐멘터리예요. 그리고 타샤 튜더는 30만평짜리 정원을 갖고서 미국 시골 전통문화적 삶을 유지하는 사람으로도 유명하지요. 다큐멘터리의 내용 대부분은 타샤 튜더의 작품을 비평한다거나 이 인물의 삶을 조망하기보다는 타샤 튜더가 전통에 기반을 둔 일상을 지내는 모습이나 90년 동안 살면서 얻은 인생의 지혜를 읊는 장면에 더 무게를 둬요.
하지만 정말로 기괴하다고밖에 말할 수가 없는 것이. <타샤 튜더>는 1830년대 미국 시골의 전통문화를 지키며 살았던 1915년도 태생의 동화작가를 2008년에 일본감독이 인터뷰와 취재를 맡아 2018년이 되어 개봉한 다큐멘터리예요. 19세기 미국의 동화 같은 정원을 복원하려고 했던 20세기의 미국 동화작가를 21세기에 일본감독이 16세기 유럽풍 동화에 대한 동경을 담아 촬영을 했다는 것이지요.
출처: 네이버 영화
조금 더 설명을 해볼까요? 영화의 내용을 차분히 살펴보면 결국 이 동화작가나 감독이나 이들이 하는 이야기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냥 자기계발서적에 흔히 들어갈 법한, 듣기 좋은지도 잘 모르겠는 아무 말들의 향연이지요.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오븐이 아닌 장작불에 고기를 구워야 맛있다고 말하는, 30만평 정원을 갖고 인세로 생활을 하는 90세 할머니의 이야기에 에어프라이어라도 10분 돌리면 다행일, 30평 전세라도 갖고 비정규직이나마 유지되면 기쁠 30세 현대인들이 무슨 감흥을 느낄 수 있을까요?
이런 아무 말들은 결국 동화작가 본인이나 이를 촬영하는 감독이나 타샤 튜더라는 한 개인을 동화에 어울리는 가상의 이미지로 구현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에요. “정답고 착한, 전통문화를 잊지 않은 동화작가 할머니”를요.
하지만 이 공통의 목표에도 불구하고 동화작가나 감독의 인터뷰는 계속해서 엇나가요. 동화작가는 19세기 미국 시골문화를 동경하는 20세기 미국 사람이고 감독은 16세기 유럽풍 동화감성에 젖은 21세기 일본 사람이라 그들은 가상의 이미지조차 서로 공유하지 못하고 있거든요. 이 사람들은 서로 대화를 나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서로의 가상들하고만 대화를 나누고 있어요.
이런 엇나간 대화가 이어진다는 느낌을 가장 강하게 받은 건 이 영화의 OST였어요. 타샤 튜더의 삶을 생각하면, 미국 전통문화나 시골의 풍경을 염두에 두면 <오 형제여 어디로 가는가> OST 정도가 이 동화작가의 삶에 어울리겠죠. 하지만 이 영화의 OST는 마치 지브리 애니메이션에나 나올 법한 소녀들의 합창과 오르골 소리로 가득해요. 미국 역사상 과연 이런 음악이 소비나 되었을까 모르겠는데 말이죠.
애초에 타샤 튜더는 2009년까지 살아있던 사람이에요. 시대적으로 투팍과 노트리어스 B.I.G보다 10년을 더 오래 산 사람이지요. 단지 미국 시골이 배경일 뿐, 이 다큐멘터리에서 만약 타샤 튜더가 라디오라도 틀었으면 아델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을 것이고 TV를 틀었으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나이트> 광고가 나왔을 거예요. 그런데도 왜 일본에서 갈라파고스적으로 발달한 메르헨풍 곡들을 OST를 집어넣은 것일까요? 아마 감독 취향이겠죠.
위에서 아주 길게 “만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일본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실사 영화들에 대해 비판을 했지요. 그런데 <타샤 튜더>는 한술 더 떠서 “동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노작가를 모셔다가 “동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감독이 서로의 동화적 세계관에 어울리는 “마음씨 따뜻한 동화작가 할머니”의 이미지를 구현하느라 대화가 지속되지 못하다 결국에는 폭발하는 새로운 형태의 기괴함으로 이뤄진 작품이니까 크리피하기로는 앞서 비판한 영화들보다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겠죠.

가상이 현실을 앞서다 못해 현실을 지울 때⋯

이 과욕 자체를 윤리적으로 비판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어떤 이미지에 과몰입해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는 상황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죠. 세련되지 못하다는 지적 이상은 어려우니까요. 하지만 이런 과욕은, 가상에 과몰입한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현실을 보지 못해 윤리적으로 어떤 선을 넘을 수 있다는 염려를 해야지 않나 싶어요.
우선순위에 있어 가상을 현실에 앞서 놓는 수준을 넘어서 아예 현실을 지우고 가상만 남길 경우, 이에 대해 스스로 인지하지 않고 있으면 분명 어느 순간 헛발질을 하게 되거든요. 예를 들면 글쎄요. <타샤 튜더>의 한 장면에서 이 동화작가의 오랜 친구이자 그 작품의 편집자였던 사람이 베트남전을 회고하고 반전 시위를 하는 민중의 모습이 교차합니다. 투팍보다 먼저 태어나 나중에 죽은 사람이라면 참으로 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목격했을 테니 다큐멘터리에 이런 장면이 들어간다고 의아할 일은 아니지요.
하지만 그 편집자는 베트남전과 반전 시위를 하는 사람들을 놓고서 “그 시기는 위기의 시기였고 그렇기에 타샤 튜더의 작품 속에 담긴 전통적 가치관의 소중함을 많은 사람들이 깨달았다”라는 식으로 인터뷰를 하더군요. 이 발언 속에 담긴 이 노골적인 정치적 함의를, 과연 이 영화의 감독이나 타샤 튜더 본인이 이해를 하고 스크린에 담았는지는 모르겠네요.
“만화/동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라는 지적은 달리 말해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라고도 바꿔 말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이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또 “자기에게 불리한 것/자기가 잘못한 것을 보지 않는다.”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고요. 그러니 가상이 현실보다 앞서다 못해 현실을 지울 때 이런 문제를 일으키는 건 어찌 보면 필연일 거예요.

참고자료

손지상 작가, 칼럼 <코미디언, SMAP, 만화가 = 야쿠자?>
일본 사회가 가상을, 현실세계가 아닌 닫힌계를 바라보는 태도에 대한 많은 힌트가 담겨있어요.

dcdc가 소개하는 좋은 이야기

후쿠다 유이치 감독, 소라치 히데아키 원작 <은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어느 가족> 우에다 신이치로 감독,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글. dcdc "<타샤 튜더>를 보고 질색한 나머지 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너무나도 하고 싶은 욕설이 많은 나머지 길게 글을 쓰다가 마감도 어겼고 분량도 절반 가까이 줄여야만 했네요. 제가 완전과욕..."
편집. May(김미루) "'똑똑똑 작가님~ 마감이 오늘까진데..' 카카오톡 이모티콘, 그 이모티콘을 사야 할까 고민했어요... 글을 받아 보니 할 욕이 많았다는 것에 십분동감했습니다만, 아직 장바구니를 비우지는 않았습니다. (단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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