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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진짜 첫 번째 소설?

분류
파트너멤버
작성자
해도연
누가 제게 언제부터 소설을 썼냐고 물으면 저는 2017년 4월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때 “에일-르의 마지막 손님”이라는 단편을 썼고 브릿G에 공개를 했었습니다. 처음 노렸던 공모전에는 당선되지 못했지만 애초에 공모전을 계기로 뭔가 써보자는 생각이었고 리뷰와 댓글도 몇 개 받은 덕분에 이후로도 계속 쓰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여기까지 왔죠. 그런데 말입니다. 시간을 되돌려 보면 저는 그보다 훨씬 전에도 소설을 쓴 적이 있어요. 무려 20세기의 일이에요.
1998년, 저는 영화 ‘에이리언4’와 사랑에 빠집니다. 기괴하고 불쾌한 비주얼과 음악, 그리고 복도가 끝없이 이어지는 좁은 우주선에 타액을 잔뜩 흘리는 우주괴물과 갇혀 있다는 설정은 제게 너무나도 달콤했습니다. 이후, 저는 에이리언 시리즈를 역순으로 섭렵했습니다. 왜 역순이었는지는 저도 잘 몰라요. 비디오 가게 아주머니도 신기해 하더라고요. 넌 왜 항상 역순으로 보냐고. 그러고보니 당시 비디오 테이프 두 개로 나눠져 나왔던 타이타닉도 역순으로 봤네요. 아무튼. 저는 제노모프라는 기원을 알 수 없는 생명체가 존재하는 우주의 매력에 흠뻑 젖었고 그 축축한 흥분을 어떻게든 표현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만화를 그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만화입니다. 제가 이래뵈도 초등학생 땐 그림을 좀 그렸습니다. 물론 그림에 관심 없는 또래에 비해서 그렇다는 얘기지만요. 제목은 ‘에이리언 스터즈’. ‘스터즈’에는 아무 의미도 없어요. 그냥 멋있어 보여서 붙인 이름이었죠. 설정상으로는 ‘에이리언4’에서 수백 년이 지난 뒤입니다. 에이리언 스터즈는 제노모프의 후손인거죠. 왜 제노모프 스터즈가 아니냐면, 그땐 제노모프라는 이름을 몰랐거든요. 에이리언 스터즈는 제노모프와 비슷하지만 뒤통수에 뿔이 있고 배에도 커다란 입이 하나 더 있습니다. 당시에 ‘스페이스 인 블러드(Not of this earth)’라는 제목의 영화가 수입되었는데 그 영화에 배에 입이 달린 외계인이 나온다는 소식에 흥분했던 영향이 반영된 거죠. 정작 나중에 그 영화를 봤더니 그 입이란 게 그냥 사람 배를 가로로 찢어놓은 게 전부라 실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쨌거나, 그렇게 에이리언 스터즈가 탄생했습니다.
일어나는 일은 에이리언 시리즈와 비슷합니다. 어떤 경위로 우주선에 에이리언 스터즈가 침투하고 대학살극이 벌어지는 거죠. 여느 초등학생 남아처럼(아마도) 잔인하고 피가 터지는 걸 좋아했던 저는 아주 정성스럽게 괴물의 살육극을 묘사했고 제법 관심을 받았습니다. 물론 선생님과 여자아이들, 그리고 지금말로 인싸에 속하는 아이들에게는 통하지 않았지만요. 만화 ‘에이리언 스터즈’는 당시 중학생 공책이라고 불리던 조금 두꺼운 공책 네 권 분량까지 만들어졌습니다. 마지막이 어땠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완결이 아니었던 건 분명해요.
그림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다는 생각에 시작한 것이 바로 소설입니다. 학년이 올라가고 저는 이종호 작가의 ‘피라미드’라는 SF우주대서사시에 빠졌기에 소설이 이런 거구나 하는 인지를 얻은 타이밍이었죠(전 ‘피라미드’ 시리즈가 정말 가능성이 많은 작품이라고 생각하는데 지금은 완전히 묻혀서 좀 아쉽네요). 마침 집에 컴퓨터도 생겼겠다 저는 소설 ‘에이리언 스터즈’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시간보호막을 두른 우주선이 초광속비행을 시작했는데 실험실의 에이리언 스터즈가 탈출을 해요. 유전적으로 사람을 공격하면 발작을 일으키기 되어 있어 안전하다고 방심했는데 이 안전장치가 후손에게는 전달되지 않는 형질이라는 게 드러나고… 뭐, 그렇게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제법 읽어주는 사람이 있었어요. 후속편도 썼습니다. 이번에도 읽어주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래서 3부를 쓰면서 삼부작으로 끝냈습니다. 여기까지 오니 당시 글쓰기로 상을 자주 받던 여자 급우 한 명이 이걸 어디에 보내보는 게 어떠냐는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글의 내외적 끔찍함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기에 생각해 보겠다고만 하고 넘겨버렸죠. 그때 정말 어디에 보내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실 아무 일도 없었을 겁니다. 세 문단에 한 번 씩은 반드시 사람이 찢겨져 죽는 이야기를 좋아할 어른은 없죠. 실제로 제일 즐겁게 읽어준 친구의 어머니가 이걸 읽고는 아주 심각하게 제 상태를 걱정했다고 합니다.
만화 ‘에이리언 스터즈’는 아쉽게도 지금 남아있지 않지만, 소설 ‘에이리언 스터즈’는 아직도 제게 있습니다. 파일은 없고 인쇄해 직접 제본한 것과 이걸 스캔한 게 남아있죠. 우주선을 배경으로 한 1편은 정말 끔찍합니다. 공중도시에서의 참사를 그린 2편은 분량만 늘어났을 뿐 여전히 끔찍합니다. 반 쯤 사이보그화된 신종 괴물이 나오는 3편은 그나마 소설의 형태를 갖추긴 했지만 역시 끔찍하고요. 그래서 저도 어디까지나 기록을 위해 남겨두고 있을 뿐, 이걸 다시 들춰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에이리언 스터즈의 역사는 제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끝이 납니다. 중학교 때는 에반게리온에 푹 빠져 ‘애프터 임팩트’라는 제목의 이야기를 쓰려고 한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도입부만 슬쩍 쓰고 끝났죠. 친한 친구들을 주인공으로 한 것도 쓴 적이 있는데, 이건 좀 신기합니다. 설정이 나중에 나온 J.J. 애이브럼스의 ‘로스트’와 아주 비슷했거든요.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정체불명의 섬에 추락하고 생존자들은 섬을 둘러보다가 정체불명의 생명체와 연구시설을 발견하는 등등. 단순한 우연이겠지만요. 이것 역시 도입부만 쓰고 끝났어요. 초고나 퇴고의 개념 없이 그냥 게시판에 바로 써서 올렸던 만큼 지금은 남아있지 않아요.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자습시간이 너무 지루한 너머지 수업자료 뒷면에 볼펜으로 직접 이야기를 하나 써내려 갔습니다. ‘인형’이라는 제목의 엽편이었는데 작은 반전을 담고 있는 이야기였죠. 굴러다니는 양면지에 썼던 거라 당연히 지금은 저 종이가 남아있지는 않고요.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딱 한 페이지 써 본 적이 있습니다. 문득 어떤 이야기와 반전이 떠올라 키보드를 두드려 본 건데 더 이상 이어지지는 않았어요.
제가 2017년에 ‘에일-르의 마지막 손님’을 쓰기 전까지 썼던 이야기들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렇다면 왜 2017년부터 쓰기 시작했다고 말을 하는가. 그 전에는 소설을 쓴다는 의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에요. 초등학생 때는 만화로 그리다가 버거워서 일종의 편법으로 그림 대신 문장을 선택한 거였어요. 그 이후의 것은 겨우 종이 몇 쪽 분량이었고 끝까지 마무리한 것도 하나도 없고요. 짧게 쓰고 만 것들을 아직도 기억하는 건 정말 그거 말고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죠.
아무튼 그렇습니다. 누가 첫 번째 소설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저는 ‘에일-르의 마지막 손님’이라고 대답하면서 초딩 때 우주괴물 소설을 쓴 적은 있다고 주석을 달아두고는 합니다. 그래도 과거 20년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작과 끝을 가진 이야기를 쓴 것이니 최소한의 존중은 보여야 하니까요.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파트너 멤버 해도연
"영화 에이리언 시리즈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건 3편입니다. 팬은 물론이고 감독조차 싫어하는 3편이지만 저는 여기에 담긴 숨막히는 무력감이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