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마지막 주를 추방(=안전가옥의 휴가 제도) 일정으로 잡았습니다. 워싱턴에 갈 계획이었어요. 한 열흘 동안 박물관들에 틀어박힐 생각이었죠. 이렇게 전 세계가 판데믹에 빠질 줄 누가 알았겠어요? 제 추방 일정만 빼고 모든 것들이 바뀌었죠.
개신교 교회에서 부르는 노래 중에 <그 날이 도적같이> 라는 곡이 있습니다. 신약성서의 사도 바울이 여러 동네에 보낸 편지에서 자주 나오는 표현이죠. 어릴 때 부터 이 표현을 참 좋아했습니다. 비단 종말의 때를 은유하지 않더라도, 우리 삶에서 크고 작은 일들은 언제나 도적같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곤 하니까요. 저의 4월도 그랬습니다.
워싱턴 대신 향한 목포에서, 신항만에 거치된 세월호를 만났습니다. 인양된 세월호를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는데요, 첫 인상은 의외로 시시한 것이었어요.
와, 크다.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컸습니다. 이렇게 커다란 배가, 304명의 삶을 품고, 석연치 않은 이유로 가라앉았구나. 그 날 남부지방에서는 강풍경보가 내려졌고, 아프게 귀를 때리는 바람 사이에서 울먹임을 들은 것 같기도 합니다. 새삼스럽게 춥더라구요. 온 세상에서 여기가 제일 추운 것 같았어요.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메일을 하나 썼습니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꺽꺽대며 울었어요. 그렇게 슬플 일이 아니었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메일을 쓸 날이 오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었나봐요. 참 거만했거나, 아니면 둔했던 것 같아요. 세월호 같이 커다란 배도 가라앉는데, 고작 백키로짜리인 내가 무너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니요.
그리고 다음 날엔 (셋째)큰아버지의 부고를 들었습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어요. 아버지의 형제들 중 (저희 아버지를 제외하고) 가장 젊은 분이셨어요. 가장 가까운 형을 잃은, 마치 도둑맞은 듯한 아버지의 표정을 봤습니다. 한참 어린 동생을 먼저 떠나보내는, 이제는 거동조차 불편하신 고모들과 큰아버지들의 표정을 봤어요. 그리고 저와 또래가 가장 비슷한 사촌 누나와 형의 표정도 봤죠.
참 복잡하더라구요. 웃음에도 물기가 어리고, 가장 작은 소리로 하는 말들도 잘 들렸죠. 누군가 떠나보내는 자리에서야 겨우 한 자리에 모이는, 가족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도 자주 생각했어요. 잦은 눈물과 물기 어린 웃음 사이에서, 실제로는 들렸을 리 없는 강릉 바다의 파도 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하구요. 아마도 돌아가신 큰아버지가 저를 바다에서 여러 번 구해주셨기 때문인 것 같아요.
간단히 글로 적는것도 숨이 찰 정도로 힘든 4월이었어요.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이 모든 일을 겪는 동안 자꾸만 교회에서 부르던 노래 <그 날이 도적같이>가 입가에 떠오르고 사라지기를 반복했어요. 가사에 비해 리듬과 멜로디는 너무 유쾌해서, 외려 불쾌한 기분마저 드는 그 노래가 왜 자꾸 들러붙는지 모르겠어요. 심지어 나도 모르게 부르고 있더라니까요? 대충 부르는 것도 아니고, 엄청 바이브레이션까지 넣어가면서요.
그 날이 도적같이 이를 줄 너희는 모르느냐
늘 깨어 있으라 잠들지 말아라 주님과 동행하라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늘 깨어 있고, 잠들지 않고, 주님(?)과 동행한다면, 도적같이 이르는 그 날을 막을 수 있을까요? 남측의 하정우와 북측의 이병헌, 그리고 미국의 마동석이 힘을 합쳐도 백두산 폭발 하나 막을 수 없는데?
사도 바울 선생도 알고 계셨을 거에요. 막을 수 없다는 걸요. 그러니까 ‘도적같이’라는 표현을 쓰셨겠죠. 그러니 우리가 해야할 일은, 도적같이 이른 ‘그 날’에도, 스스로를 무너뜨리지 않는 것, 인간으로써의 존엄과 자비를 잃지 않는 것 아닐까요. 아무리 ‘그 날’이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말이에요.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운영멤버 Shin
"그렇다고 ‘그 날’이 무조건 나쁜 날이라는 법은 없죠. 좋은 날도 ‘도적같이’ 올 거에요. 왜 요즘 젊은 친구들이 쓰는 표현 중에 ‘덕통사고’ ‘치였다’ 이런 것들도 있잖아요?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