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신학기가 1월 끝나자마자 시작되는 모양입니다. 예전엔 분명히 3월이었던 것 같은데, 아마 지구 자전축의 요동이 원인이겠지요. 아니면 교육제도의 변화 때문이든지요. 아무튼 새 학기가 되면 학생들이 학교에 가서 새로운 지식을 배울 것이고, 그 중 일부는 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기적적으로 기억에 남기도 할 것입니다. 저는 아직도 ‘모헨조다로’와 ‘하라파’라는 도시 이름, 깻잎 돼지고기전, 솔레노이드 내부 자기장 방향 알아내는 법을 기억하고 음악 시간에 배운 노래들을 부를 줄 압니다. 어떤 건 계이름으로도 부를 줄 알아요! 왜냐면 그걸 달달 외워서 음악 시험에 써야 했으니까요. 시험 공부하면서 무작정 외운 암기과목 내용 일부분이 맥락에서 벗어난 정보의 파편이 되어 머릿속을 떠돌고 있는 거죠.
음, ‘암기과목’이라는 말은 사실 학교에서 나오고 나면 전혀 의미가 없는 표현이긴 합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땐 보통 수학은 암기과목이 아니고, 생물은 암기과목이고, 그런 식으로들 얘기를 했어요. ‘중요한 내용만 집중적으로 외워 놓아도 점수가 어느 정도 나오는’ 과목을 암기과목이라고 부른 것인데, 사실 수학이라고 해서 암기의 비중이 딱히 낮은 것도 아니었고 생물 시험에서도 정말로 달달 외우기만 해서 풀 수 있는 문제는 일부분에 불과했단 기억이 있습니다(여러분이 소위 ‘함정 문제’ 유형까지 달달 외웠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이건 수학 시험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얘기니까요). 그나마도 이건 고등학교 때까지의 얘기일 뿐이지요. 대학 과정 이상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 보면 수학이든, 생물이든 결국 외울 것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고 그냥 다 한없이 복잡해지게 마련입니다. ‘암기과목’이란 결국 그 복잡한 영역을 중고등학교 과정 내에서 소화할 수 있도록 최대한 단순화해 놓은 결과물일 뿐인 거지요.
이를테면 누구든지 과학 시간에 ‘여자=XX 염색체, 남자=XY 염색체’ 공식을 배웠을 겁니다. 간결하고 명확하고 알파벳도 두 종류밖에 안 나와서 외우기까지 쉽지요. 사람의 염색체가 몇 쌍인지, 염색체를 언제 관찰할 수 있는지, 뭐 그런 내용은 머릿속에 남지 않았을지라도 저 두 가지만큼은 아마 죽을 때까지 기억에 남겠죠. 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생물이 저런 방법으로 성별을 결정하지도 않고, XY 염색체를 가졌다고 꼭 남성으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성별을 결정짓는 것은 Y 염색체가 아니라 그 위의 유전자인데 또 단일 유전자에 의해서만 이뤄지는 과정도 아니고, 결국 성별 구분이라는 것은 온전히 생물학적인 것이라기보단 사회적으로 구성된 개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고……자세한 내용을 전부 설명하고 각각에 대한 예시를 들었다간 월간 안전가옥의 분량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날 테니 여기서는 어쩔 수 없이 생략할게요. 아마 중고등학교 교과서 저자들도 똑같은 마음으로 내용을 생략해야 했을 겁니다. 그 결과 여러분의 머릿속에는 알파벳이 둘밖에 안 나오는 가장 간결하고 부정확한 정보만이 남게 된 것이겠죠.
물론 정확한 내용을 가르치겠다고 학생들한테 6년 내내 생물 강의만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알기 쉽게 간략화해 놓은 내용만을 금과옥조처럼 신봉하면서, 더 정확하고 복잡한 생물학적 사실들을 애써 부정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생물학이 만만하냐?”는 소리가 안 나올 수도 없어요. 고등학교 때 미적분 배운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미적분의 모든 것을 깨달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드넓은 수학 세계의 극히 일부분에 발만 살짝 담가 보았을 뿐이라는 걸 알고 있지요. 그런데 왜 생물학으로 넘어가면 얘기가 달라질까요? 암기과목이라서? 시험 공부하느라 열심히 외운 내용이 곧 진리여야만 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시험 공부가 다소 무위로 돌아간 것은 저도 대단히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생물학은, 세상은 시험지 한두 장에 담기에는 너무 복잡해요. 그건 과학 선생님도 어떻게 해줄 수가 없답니다.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파트너 멤버 이산화
“SF 작가.유기화학이 너무 복잡해서 포기한 전력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