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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유월의 어느 날로부터

분류
운영멤버
기획PD
작성자
모 Mo
미국에서 열린 월드컵을 보기 위해 거실 티비가 켜진 새벽, 가벼운 타박과 함께 볼륨이 줄어들었다. “안 그래도 잠 못 들었을텐데 꼭 그걸 봐야겠어?” 그래도 티비는 꺼지지 않았고 나 역시 그 후로도 잠들지 못했다. 우리나라가 몇 번째 월드컵 진출인지도 몰랐고, 그 후로도 2002년이 되기 전까지 월드컵 경기 결과를 기억 못 하지만 딱 한 경기, 94년 미국 월드컵 마지막 경기 날짜와 스코어는 지금까지도 또렷하다.
5월 생일이 지나고, 6월을 마주하며 떠오르는 소설이 있다. 아마도 매년, 이맘 때 떠올릴 것 같은 책은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 심시선 여사의 10주기를 맞아 하와이에 모인, 그녀로부터 뻗어 나온 기세 좋은 사람들이 나온다. 도발적이다 싶을 정도로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자신의 신념을 글과 말로 거침없이 풀어내는 할머니와 마주한 셈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이들은 저마다 그녀로부터 받은 씨앗을 키우고 소중히 돌보며 살아가는 듯 보였다.
소설 속 심시선 여사는 강렬한 인물, 보편적이지 않고 쉽사리 희미해지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내게 94년 월드컵 마지막 경기가 독일전이며, 2:3으로 패했던 그 새벽을 기억하게 만든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일 년에 딱 하루, 그녀를 만나러 이천에 가기 전날 이 책을 다 읽고는 마음이 참 묘했다.
마흔을 목전에 두고 숲으로 돌아간 서른 아홉의 그녀는 나의 엄마, 김연자씨다.
초등학교 때 돌아가신 엄마는 내가 10살 때 유방암이라는 진단을 받으셨다. 초기였지만 그때와 지금의 의료 기술은 많이 달랐고 엄마의 투병 시기는 3년 남짓이었다. 94년 한 해의 기억이란 6월 며칠만 아주 또렷하고 사실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소복이 불편해 입지 않겠다고 뛰어다니던 나, 나의 청춘이라 불리울 친구들이 병원 입구에서 처음으로 장례식장에 왔다며 어색하게 마주했던 순간, 며칠 엄마 성당 친구네 집에서 잠을 자고 장례미사를 앞두고 물끄러미 영정사진을 보던 새벽, 국화꽃을 놓으면 다 끝나는 줄 알았는데 그로부터 한참을 기다려야 해서 짜증이 잔뜩 났던 이천에서의 기억까지. 하지만 좀처럼 돌아보지 않는 기억이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시선으로부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심시선 여사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고백한다. 꼭 핏줄이 아니더라도, 사위나 며느리 심지어 성이 다른 딸까지도 심시선 여사로부터 받아 뻗어 나온 가지가 있듯, 내게 분명히 남아 있을, 연자씨의 조각들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딘가 어색해 좀처럼 연자씨 얘기를 아빠에게 꺼내는 법이 없었는데 벌초를 하다 말고 물었다. “엄마는 어떤 음식을 좋아했어?” 살짝 당황한 아빠가 느껴진다. 부러 높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빠는 나중에 마블 많은 소고기 올려줄게. 그리고 다 끝나면 우리가 구워 맛있게 먹을게. 요즘에는 다들 좋아하셨던 음식 올린다고 하길래” 아빠는 말을 돌려 얼마 전 갔던 제사에 탕수육이 올라온 이야기를 들려줬다.
선산에서 내려오며 아빠와 다시 얘기를 했다. “내가 이런 거 물으니까 어색해?” 아빠가 이번에는 답을 해주었다. “응 그렇기도 하고. 사실 그 때는 이렇게 외식을 많이 하지도, 다양하게 먹을 수 있는 것도 없어서 딱히 그런 게 없었어.” “그랬겠다. 사실 아빠, 나는 기억이 잘 안나. 나 그 때 되게 어린이였나봐.” 어렸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게 당연하지 라고 말해주던 아빠가 문득 언니와 나를 보며 말했다. “엄마는 책 좋아하고 글 쓰는 거 좋아했어. 알뜰한 건 선화가 닮았지.”
그랬다. 아빠가 재혼을 하시고 어느 해, 엄마의 일기장과 앨범을 발견한 언니가 벽장에 몰래 숨겨두고 보여준 적이 있었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 한 구절은 ‘A(여기서 A는 나다, 세레명으로 가족을 구분했던 엄마)가 받아쓰기를 빵점 받아왔다. M(우리 언니다)때는 안 그랬는데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주말을 가족과 보내고 고요한 나의 작은 집으로 돌아와 다시 엄마를 떠올렸다. 번듯했던 단독주택을 말아 먹어 힘들었던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을 기록하고 글을 읽고 아름다움을 발견했던 엄마. 분명 나를 나답게 하는 것들 중에는, 스마트폰도 써보지 못하고 물을 사 먹는 게 당연해지고, 새벽이면 배송이 오는 시절을 겪진 못했어도 분명 연자씨가 내게 심어주고 간 것들이 있을게다. 받아쓰기를 빵점 받아와서 당황했겠지만. 그것들이 지치고 엉망인 날에도 날 힘껏 등을 밀어주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운영멤버 모
"그런데 엄마 그런 내가 이야기를 만들고, 알리는 일을 하고 있어. 세상 일은 참 알 수 없지? 앞으로도 힘차고 아름답게, 기세 좋게 살아볼게. 다음에 또 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