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집을 전전하는 서울 뜨내기 생활도 어느덧 15년을 훌쩍 넘었습니다. 집을 옮겨갈 때마다 제 팔목은 파스 신세를 집니다. 물건들이 새로운 공간에 들어차고 겨우 제자리를 찾으면, 그때부터 저는 제 작은 행복을 위해 케이블타이를 꺼내 듭니다. 숨어 있는 고양이를 찾듯이 온 집 안 구석구석을 들추며 틀어지고 헝클어진 물건들을 모조리 묶습니다. 그러면 묶어서 사라진 틈만큼 조금씩 기분이 좋아집니다. 이곳에 이사와 한동안은 치우고 또 치우고. 그렇게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애쓴 날들을 보냈습니다.
한동안 그러지 않았는데, 지난 휴일에는 왼손이 욱신거려 기어이 파스를 붙였습니다. 다시 정리정돈 시즌이 돌아온 겁니다. 엉망진창인 서랍장을 정리하고, 아무렇게나 쌓아두었던 책들을 정리하고, 흐트러진 것들을 모조리 묶어버렸습니다, 케이블타이로요. 온종일 몸을 움직여 피곤한데 늦은 밤이 되어서야 잠이 들고 다음 날은 아침 일찍 깼습니다. 다음날도 세수도, 양치도 안 한 채로 다시 정돈을 시작했습니다. (뭐, 이렇게 설명하면 제 방이 한 오십 평 되는 것 같지만 제 거처는 칸막이도 없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원룸입니다) 다른 일을 하다가 문득 붙박이장을 열고 죄다 끄집어내고 다시 집어넣고, 옷장을 열어 죄다 끄집어내고 다시 접어서 넣기를 반복했습니다. 묵은 먼지에 재채기하면서.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지낼 날도 한 달 남짓입니다.
이곳에 이사 온 후 날씨가 좋은 날은 아침 독서를 하곤 했습니다. 최근 한 달은 곧 떠날 이곳에서의 생활을 나 혼자 아쉬워하며 거의 매일 귀마개와 책을 들고 16층 옥상으로 올라가 책을 읽다가 내려왔습니다. 그러고 나면 순조로운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지요. 이곳에서 서서히 나의 루틴을 찾아가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요즘 새로운 거처를 알아보느라 이곳저곳을 기웃거립니다. 지금은 제가 대학에서 공부한 건축과는 많이 동떨어진 일에 몸담고 있지만, 건축을 공부한 덕에 품게 된 절대적 사실 중의 하나가 있습니다. 공간은 사람을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대학 신입생 시절, 건축은 위험한 학문이라는 말씀을 하셨던 교수님의 한마디는 지금 듣기에도 과하게 들리지만, 그땐 건축의 ㄱ도 몰랐던 시절이었으니 더욱이 터무니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공간은 극적이지 않으니까요, 특히 주거 공간은요. 하지만 건축물은 ‘시간’이라는 대단한 친구를 두어서 아주 뭉근하고도 묵직한 고집쟁이처럼 사람을 움직입니다.
그리고 저만의 해석 중에 하나라면 창은 건물의 말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깥에서 창을 보면 물리적으로도 그 건물의 용도나 연식도 짐작할 수 있지만, 건물의 정신적 나이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같은 말은 아니지만, 제가 좋아하는 건축 에세이의 창에 관한 몇 문장을 발췌합니다.
창은 안인가 밖인가? 안과 밖의 구분에서 창은 그 예리한 구분의 단면이다. 안의 기능을 담고 있지만, 밖의 질서의 기준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치 다중 언어 사용자처럼, 각 언어 사이에 막혀 있는 통로를 스스로 돌파하며 우리가 가진 상상력과 통찰력을 더 키우라고 말하는 것 같다.
<진심의 공간_김현진 저> 92p
저는 이 공간에 들어오던 날,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슬픈 일을 막 겪고 이곳에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종종 이곳의 전망이, 태양을 마음껏 받아들이던 창의 말이 참 따뜻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제 괴로움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의 창이 제게 관대했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인가 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맞아요. 그냥. 이곳을 떠나기가 아쉽다는 말을 이렇게 주절거리는 중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공간을 만나 그곳에서의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가는지, 그게 자꾸만 기대되는 걸 어쩌나요. 상상력은 아쉬움을 이깁니다.
이사 준비 중입니다. 한참 더운 7월이면, 이곳엔 제가 아닌 누군가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안전가옥도 작별을 준비 중입니다. 집을 떠나듯이 작별하길 바랍니다. 아쉬움보다는 벅찬 기대가 함께하길 바랍니다. 잘가요, 신.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운영멤버 헤이든
"제가 좋아하는 건물 중의 하나를 소개해요. 이곳의 창을 정말 사랑합니다. 한번 꼭 가보세요."
춘천어린이회관 | 건축가 김수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