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직장 상사의 진로 상담을 해드렸어요. 남들보다 꽤 이른 시기에 관리자로 승진한 그는 지금부터 더 높은 자리를 향해 전력으로 나아가야 할지, 아니면 가족들과의 소소한 일상을 챙기며 이 정도 수준에서 만족하며 머물러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죠. 한참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대체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아저씨의 인생에 대해 내가 뭘 안다고 이렇게 상담을 하고 있는 거지?
이상하게도 어릴 적부터 제게는 고민을 상담하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비밀을 잘 지킬 거라 생각해서인지,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편이라 생각해서인지, 특별히 리액션이 좋은 건지, 칭찬의 스킬이 좋은 건지, 스스로도 모를 마성의 매력이라도 있는 것인지. 사람들은 기꺼이 제게 비밀 이야기를 들려주곤 해요.
상담의 대상도 내용도 정말 다양해요. 회사 상사의 가정사, 동료 직원들의 부부 클리닉, 혹은 그 자녀의 진학 문제, 친척들의 취업 컨설팅, 온·오프라인 지인들의 연애 문제, 친구들의 인생 상담, 재테크 고민, 그 외의 소소하고 우울한 고민들…
한참 부족한 저에게 왜들 그렇게 고민을 털어놓는 걸까요. 저는 전문 상담사도 아니고, 심리학에 대해 배운 적도 없는 데다, 유일신과의 중재자가 되어줄 수 있는 부류도 아닌데요. 저보다 더 능력 있는 사람을 찾아갔더라면 훨씬 큰 도움을 받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어주지 못해 매번 안타까워요.
사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이야기를 듣는 것뿐이에요. 그리고 상대가 했던 말을, 혹은 했음직한 말을 제 입으로 되돌려줄 뿐이죠. 마치 거울처럼요. 당신의 고민도 당신의 해답도 모두 당신 안에 있는 법이니까. 보통은 그걸로 충분해요. 어차피 대개는 그저 푸념을 하고 싶었던 것뿐이거든요. 몇 마디 말로 해결할 수 있는 일도, 딱히 해결을 원하는 일도 아니었을 거예요.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 저는 사람들의 애환을 듣는 일을 좋아합니다. 그들의 사연을 통해 제 안의 세계가 더 확장되는 듯한 기분이 들거든요. 게다가 저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니까, 색다른 글쓰기의 재료라면 언제든 환영이죠. 저는 언제든 들을 준비가 되어있어요. 좋은 사람들의 도움이 되기 위해, 앞으로도 기꺼이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위로의 말을 건넬 거예요.
그런데 말예요.
정말 가끔은, 그럼 내 고민은 누가 상담해주나 싶기도 해요. 그리 비밀이 많은 삶이 아닌데도 때론 누군가를 붙잡고 이야기를 쏟아내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그런데 평생 듣기만 했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에는 별로 익숙지가 않아서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조차 모르겠어요. 가까운 사람을 걱정시키기도 싫고. 감기처럼 스쳐 지나갈 우울감을 널리 퍼뜨려 무얼 하나 싶은 마음도 들죠.
하지만 정말 가끔은, 저도 누군가에게 마구 수다를 쏟아내고 싶어져요.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사람에게. 아,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저를 찾아오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누군가와 쉽게 친해지지도, 쉽게 멀어지지도 않는 저만의 거리감 때문일지도.
언젠가 불쑥 상담을 요청해도 당황하지 마시길. 당신과 더 친해지고 싶다는 뜻도, 이제 멀어지겠다는 뜻도 아니니까. 가만히 듣고서 제가 했던 말을 그대로 다시 돌려주시면 된답니다.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파트너 멤버 이경희
"언제든 부담 없이 연락 주세요. 기꺼이 당신의 주위를 맴돌아 드릴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