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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 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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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추위를 싫어한 펭귄>이라는 동화가 있었다. 계몽사였나 아무튼 디즈니 명작선집 중 하나였다. 뭐 대충 이야기는 이렇다. 남극의 한 펭귄이 추위를 너무 싫어해서 탈출하려고 스키를 탔다가 욕조 뗏목을 타고 떠나려 했다가 뭐 각종 시도를 하지만 실패했고, 그럼에도 의지를 잃지 않고 어찌어찌 얼음 뗏목 같은 걸 만들어서 결국 따뜻한 곳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는 이야기. 다 커서 생각하면 특별할 것 없는 내용이지만 이야기도 귀엽고 삽화도 귀엽고 해서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남극이 오죽 추웠으면 그 펭귄마저 도망치려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게 했고.
그 겨울과 얼음, 추위의 상징인 남극이 관측 이래 최초로 20도의 기온을 기록했다. 같은 시기 미국의 LA 기온이 19도였다고 한다. 추워서 펭귄마저 도망치려 했던 그 남극이, 와썹맨의 고장 LA보다 따뜻해져버렸다. 펭귄은 진흙투성이가 되었다. ‘남극이 너무 추워서 스키를 타고 따뜻한 곳으로 떠나려 했던 펭귄’보다 LA보다 따뜻해져서 녹아버린 빙하에 젖어버린 펭귄이, (이것이 적절한 표현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더 ‘허구’적이다. 솔직히 <추위를 싫어한 펭귄>을 읽던 5~6살의 내가 이걸 알았다면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2.
10년 쯤 전에 한창 <나는 가수다>가 잘나갈 무렵. 임재범이 어느 토크쇼에 나와서 진지하게 자신의 꿈을 그래미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뭐 그간 알려진 기인 같은 그의 성향 등을 감안하면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동시에 허언증이 좀 과하다는 생각도 안한 것 아니다. 실제로 그 방송 이후 임재범은 꽤 악플을 받았던 것으로 알고있다. 아니 그 JYP가 원더걸스를 미국에 보낸 것도 허황된 일로 여겨지는 판에 임재범이라니. K-pop의 현실은 끽해봐야 일본어와 그 시장을 열심히 공부/준비했던 보아나 동방신기 정도가 아닐까 하는 의견.
그런데 이름마저도 생소한 방탄소년단이 BTS라는 이름으로 미국을 뚫기 시작했다. 빌보드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고, 팬덤을 몰고 다니기 시작했고, 스타디움에서의 콘서트를 매진시켰다. 미국에서 음악 쪽 일을 하는 친구 얘기를 듣자하니, BTS는 이제 ‘K-pop’ 가수가 아니라 그냥 탑 급 팝가수의 대우를 받는다고 한다. 출연료든 조건이든 이런 데에서 이제 아리아나 그란데와 비교하는 그런 급이 되었다고. 그리고 결국, 그래미 본상 시상식의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지난주 발매한 신보는 선주문량이 400만장을 넘었다.
3.
<살인의 추억>은 그의 영화 중 내가 본 첫 영화였다. (<플란다스의 개>는 한참 뒤에야 봤다) 와, 뭔가 다르다는 생각은 했다. 그런데 해외에서 곧잘 상을 타오곤 하던 김X덕, 홍상X (혹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랑은 좀 다른 결이 아닌가 생각했다. <옥자>나 <설국열차>처럼 ‘외국배우’와 ‘외국자본’으로 만드는 영화는 좀 덜 좋았다. (이것도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외국에서 보면 결국 ‘인디’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베를린이나 깐느는 뭐 그나마 현실일지 모르겠지만, 아카데미까지는 음 뭐..
그런데 무려 그 아카데미를, 무려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한 네 개를, 한국 배우가 한국어로 연기하는 한국 배경의 이야기로, 받아버렸다. 봉준호 감독은 소위 ‘오스카 캠페인’ 동안 이어진 수 백 번의 인터뷰와 시상식에서 그리고 아카데미의 시상식에서, 한국어로 소감을 이야기했다. 월요일 오전 집에서 생중계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와씨 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감독상이랑 작품상은 진짜 이거 너무 3류 신파 반전극 아닌가, 솔직히 이 정도면 ‘브루스 윌리스가 유령이다’보다도 더 말이 안되는 것이 아닌가, <국제시장>보다 국뽕 아닌가.
4.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 성경 이야기에 어려서부터 관심이 있었다. 그 이야기들 중에 가장 극적인 것 중 하나가 ‘출애굽기(탈출기)’일테다. <십계>, <엑소더스>, <이집트의 왕자> 등 여러 콘텐츠로도 만들어진 이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 모세가 자신의 민족을 탈출시키기 위해 이집트에 광역 저주스킬을 시전하는 부분이다. 판타지보다 판타지 같은 여러 스킬이 난무하는 이 장의 절정은 역병이다. 결국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를 굴복시키고 마는 이 역병의 저주는 내게 공포 그 자체였다.
중국의 우한에서 정확히 알 수 없는 경위로 발견된,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는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진행형인 공포다. 그저(?)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성 질환인 줄 알았던 이 공포는 ‘신천지’라 불리는 종교세력과 결합하며 거대화했다. 늘어나는 확진자 수 보다 두려운 것은 그 불확실성이다. 본능적으로 기피되는 불확실성을 해소하기 위해, 조악할지라도 강렬한 픽션- 혐오가 등장한다. 중국인 혐오, 지역 혐오, 세대별 혐오, 정부 혐오, 무지 혐오, 혐오에 대한 혐오. 알 수 없는 재난과 혐오의 창궐, 3류 재난영화에나 나오는 클리셰다.
5.
자. 위의 네 가지 항목은 모두 지난 1개월 동안 일어난 일이다. (그래미 1/26, 오스카 2/10, 펭귄 2/14, 코로나19 국내 첫 사망 2/20) 한 달 동안 ‘한류’는 음악과 영상에서 그 실재를 증명했고 남극은 진흙탕이 되었으며 바이러스성 전염병은 지구를 덮었다. 일단 생각나는/ 기록할 만한 몇 가지만 써봐도 그렇다. 솔직히 우리가 일로 검토하는 어떤 픽션이 이런 류의 사건들을 이렇게 타이트하게 구성해놓는다면 ‘공상’이라 평했을 것이다. 맥락 없이 센 사건들 몇 개만 때려박는다고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하지만, 실재한다. 이런 세상은. 실제로.
<탑 매니지먼트> 속의 연예계보다 BTS나 봉준호가 이뤄낸 성취가 더 놀랍고, <워터월드> 속 세계보다 진흙에 젖은 펭귄 사진이 더 강렬하다. <감기>든 <구해줘>든 <사바하>든 심지어 <괴물>도, 지금 현실과 비하자면 덜 무섭고 덜 따가운 것들이다. ‘현실적’이라는 말과 ‘허구적’이라는 말은 종종 무력하다. 현실은 때론 허구보다 더 허구적이라, 어지간한 스펙터클은 현실 속의 스펙터클 앞에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그리고 지금의 현실은 인간적으로 개연성이 너무 떨어진다. (..라고 하다보니 개연성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도 든다.)
이야기(픽션)의 힘을 믿는다고 이야기한다. 픽션을 통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좋은 쪽이면 좋겠다고도 생각한다. 그를 위해 우리의 픽션이 많은 이들에게 가 닿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 픽션은, 안전가옥이 만들어야 하는 픽션, 사람들이 읽어줬으면 하는 픽션은 어때야 하는걸까... 라고 고민하는 요즘인데, 솔직히 현실이 너무 픽션보다 픽션 같아서 좀 벌-줌하다.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운영멤버 뤽
“비스트가 부릅니다. 이렇게 난 또~ (픽션 인 픽션) 잊지 못하~고 (픽션 인 픽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