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earch
📽️

다시 만난 지브리

분류
가디언멤버
작성자
OU
Written by 가디언 멤버 OU
어느 순간부터는 혼자서도 영화를 잘 보러 다니고 있지만, 어렸을 때는 그게 그렇게 어려워서 관심도 없는 엄마를 끌고 영화관을 다니고는 했다. 그리고 그렇게 덩치는 이미 큰 고등학생의 손에 끌려 엄마가 강제로 시청했던 영화들의 마무리는 2004년 말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었다. 다 큰 아들이 아직도 영화관까지 와서 만화를 본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했던 엄마는, 15년이 지나 35살에도 여전히 만화를 보고 있는 나를 보며 이제는 놀라는 것도 포기한 듯 싶다.
디즈니만큼 많은 작품들은 없지만, 그만큼이나 내 어린 시절의 로망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스튜디오가 지브리였다. 파스텔 톤의 색감으로 가득 찬 화면과 몽환적이고 주술적이며 동시에 스팀펑크 넘치는 설정, 그리고 당시의 다른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강렬한 여성 캐릭터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나우시카와 크샤나, <원령공주>의 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유바바와 제니바(?!)-은 무척이나 매력이었다.
그런 만큼 지난 2월부터 넷플릭스에서 순차적으로 지브리 애니메이션들이 업데이트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예전에 DVD로는 다 구해놨었지만, 이제 더 이상 DVD를 보지 않는(또르르…) 초현대 사회에서 그들을 다시 찾아보기는 난망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시작으로 지브리 애니들을 시간 날 때마다 찾아보는 것이 당분간의 묘미였다.
그러던 중 마지막으로 6월에 본 것이 <천공의 성 라퓨타>였는데, 어쩐지 미묘하게 느낌이 달랐던 이유는 무엇일까. <천공의 성 라퓨타>는 고대 문명과 숨겨진 혈통, 잃어버린 초과학 기술과 병기로 만들어졌지만 평화를 사랑하는 로봇까지 후에 수많은 일본 컨텐츠의 클리셰의 근원인 고전 중의 고전이어서 보는 재미가 쏠쏠한 애니메이션이지만, 그럼에도 뭔가 찝찝한 느낌은 아마도 수동성으로는 지브리로는 탑을 달리는 여주인공 시타에게서 온 것 같다. 86년에 개봉한 영화이니만큼 어쩔 수는 없겠지만 2020년대의 PC 감성으로는 마냥 떨어지고 비명 지르는 여주인공에게 감정 이입하긴 힘들 수 밖에…
2020년대의 감성으로 재디자인된 <천공의 성 라퓨타>는 어떤 느낌일까. ‘패악질’을 부리는 정부와 자연 파괴에 신물 난 에코테러리스트 시타가 처음부터 도라와 손 잡고 라퓨타를 공략, 라퓨타의 완전 컨트롤을 손에 넣고 그를 바탕으로 군부를 무력화하고 자연과 함께 지속가능하게 생존할 수 있는 자연친화 독재를 시작하는…이라고 쓰다보니 어쩐지 ‘유년기의 종말’과 너무 비슷해져 버린 느낌이다. 하지만 이렇게 스토리가 흘러버리면 그 또한 미야자키 하야오 특유의 낭만적이고 교훈적인 느낌이 날아가버리니, 이래서 고전은 고전으로 남기는 것 같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사실상 은퇴 상태이고, 스튜디오 지브리의 제작팀은 해산되었으며, 그 뒤를 잇는다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 등의 성향은 나랑 너무 맞지가 않아 사실상 앞으로 내게 새로운 지브리는 없을 것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슬프긴 하지만, 그렇게 더 이상 나오지 않을 컨텐츠이기에 더 내게 큰 의미가 생기는 것 같다. 과연 앞으로 디즈니와 지브리 다음으로 내 인생의 컨텐츠가 될 수 있는 작품들을 만드는 스튜디오를 만날 수 있을까…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가디언 멤버 OU
"…그리고 그 스튜디오가 안전가옥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