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조던 필 감독의 <겟 아웃>을 다시 봤다. 그리고 이제야 이 영화의 또 다른, 일종의 감독판 엔딩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조던 필 감독의 차기작인 <어스>가 개봉한 것도 벌써 작년 일이 되었으니, 더군다나 2017년에 개봉한 <겟 아웃>의 대체 결말을 이미 알고 있는 영화광이 꽤 많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새삼스레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조금 부끄럽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이번엔 이 영화의 감독판 결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본래 결말(결말 A)은 이렇다.
주인공인 크리스가 백인 여자 친구 로즈 아미티지의 집에 초대받는다. 크리스는 그 집에서 기이하고 불길한 일들을 목격하고 마침내 아미티지 일가의 목적(최면술을 통해 흑인의 자아를 침잠의 잠에 가두고, 껍데기가 된 흑인의 몸에 백인의 정신을 이식하기 위해 흑인을 납치하는 일)을 알게 된다. 크리스는 아미티지 가족을 모두 처단하기에 성공하고, 오랜 친구 로드의 도움을 받아 아미티지 저택 탈출에 성공한다.
나는 기억력도 그리 좋지 않은 편이고, 영화감상 후 속속들이 그 영화의 리뷰를 적는 편은 더욱이 아니라서 어떤 영화를 반추해볼 때 파편적인 기억과 영화의 전반적인 인상만이 남아 있는 경우가 꽤 많다. 나에게 있어 <겟 아웃>이 내포한 의미에 비해 꽤 시원스러운 영화로 기억되는 이유는, 어쩌면 크리스의 승리로 인한 쾌감과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유쾌한 친구 ‘로드’의 대사가 남긴 인상, 결국 이 영화의 엔딩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겟 아웃>은 현실을 우울하게 바라보기보다는 엉망진창인 현실 위에 서서 냉소나마 웃을 수 있는 영화로 남아있다. 그러나 3분 남짓한 이 영화의 대체 결말을 본 후 이 영화에 대한 인상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대체 결말(결말 B)은 이렇다.
주인공인 크리스가 백인 여자 친구 로즈 아미티지의 집에 초대받는다. 크리스는 그 집에서 기이하고 불길한 일들을 목격하고 마침내 아미티지 일가의 목적(최면술을 통해 흑인의 자아를 침잠의 잠에 가두고, 껍데기가 된 흑인의 몸에 백인의 정신을 이식하기 위해 흑인을 납치하는 일)을 알게 된다. 크리스는 아미티지 가족을 모두 죽이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로즈를 처단하려 한다. 그러나 때마침 출동한 백인 경찰에 의해 크리스가 연행되고, 결국 교도소에 복역한다.
주인공 크리스는 마지막 힘까지 쥐어짜 내며 ‘그들을 멈추게 했’지만 지금은 흰 벽 안에 갇힌 채 무기력한 흑인 청년이 되어 버렸다.
두 결말의 차이는 아주 간단하다. 결말 A는 크리스의 승리로 끝난다. 이 상황을 종결하는 사람은 크리스, 즉 흑인이다. 결말 B는 상황 종결권이 백인 경찰에게로 넘어간다. 크리스는 승리한 것이 아니라 ‘아미티지의 집을 탈출하려는’ 목적을 달성했을 뿐, 결국 또다시 백인에 의해 연행된다. 즉 수동의 존재가 된다.
나는 대체 엔딩에 깔린 무거운 분위기에 적잖이 영향을 받았다. 104분이라는 러닝타임 중 3분을 제외한 나머지 100여분이 이전의 감상과 달리 읽히는 것, 영화 곳곳에 심어놓은 의미와 복선들이 모두 숨 막히게 느껴졌다. 결국 조던 필 감독이 본 미국 사회 속 뿌리 깊은 인종 차별의 문제는 이토록 잔인한 것이다. 흑인에게 가차 없는 현실을 ‘덧붙임’으로써 주인공의 승리는 승리가 아니라 주인공의 목적 달성이 되고, 또다시 좌절은 이어지는 것이다.
결말 A와 결말 B 중 ‘무엇이 더 좋은 엔딩일까?’라고 묻는다면, 내 나름의 답이 있다.
결말 B를 보기 전까지 주인공 크리스의 캐릭터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로즈의 캐릭터가 훨씬 강렬하고 힘있기도 하거니와, 크리스는 주어진 상황에 이끌려 행동하고 관찰할 뿐, 자기표현을 거의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말 B의 크리스를 본 후 앞서 지나간 장면 중 하나가 떠올랐다.
영화 전반부에 등장하는 크리스와 로즈 두 사람이 차를 타고 로즈의 집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뛰어든 사슴과 충돌하는 장면이다. 백인 경찰이 나타나 현장을 수습하는데, 경찰은 운전자인 로즈가 아닌 크리스의 신분증을 요구한다. 이때, 부당함에 항의하는 로즈와 달리, 이런 미묘한 차별에는 자포자기하다시피 한 크리스의 모습이 보인다. 영화가 가진 코미디적 요소에 가려져 있었을 뿐, 사실상 이 영화에 등장하는 흑인은 모두 아주 슬픈 무기력 상태에 빠져있다.
백인들의 어떤 차별적 시선에도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던 크리스가 아미티지 일가에 대항해 싸웠다는 것. 결국 그 일가의 악행을 멈춰냈다는 것. 나는 결말 B를 보고 나서야 크리스가 한 행동이 그저 주인공으로써 마땅히 해야만 하는 행동으로만 보이는 것을 넘어 일종의 이념적 저항으로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의 무력함과 좌절은 여전히 남아있는 결말. 이것이야말로 마침표가 붙어 있는 감독의 말이라고 생각하면, 유튜브의 짧은 클립으로나마 떠도는 <겟 아웃>의 대체 결말은 그저 이례적 시도로만 보기 어렵다.
감독이 계산해 놓은 이야기, 3분의 결말에 걸맞은 100여분의 장면들. 그래서 모든 장면이 제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는 영화 다시 말해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중단하지 않고 그 말을 끝낸 후 마침표가 찍힌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위해서라면 결말 A보다는 결말 B가 더 좋은 선택이 아닐까.
사람들은 승리한 주인공의 이야기를 보고 싶어 한다. 나는 이 말을 일견 인정하지만 여전히 경계한다. 어떤 이야기는 가뿐함이 필요하고, 어떤 이야기는 집요하게 어두운 구석을 선택해야 한다. 어떤 선택이 최선인지, 아니 그 선택이 과연 최선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그저 말하려는 사람이 말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
그것만이 이야기를 함께 만드는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라는, 설익은 깨달음을 얻어가는 중이다.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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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A건 B건 좋은 건 뭐, 뭐가 됐든 좋긴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