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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문을 읽는 삶

분류
운영멤버
스토리PD
작성자
헤이든
오전 7시 40분. 그날따라 예정한 시각보다 일찍 잠에서 깼습니다. 9시 30분에 운전면허 필기시험이 있는 날이었거든요. 더 잘까 고민했지만, 이왕 눈을 뜬 김에 아침 시간을 즐길 겸 채비를 하고 길을 나섰어요. 여유롭게 커피도 한 잔 샀습니다. 운전면허 학원은 집에서부터 도보로 약 2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습니다. 바쁘게 걷는 사람들 틈에서 홀로 아침 여유를 즐기며 느긋하게 걸었지요.
이른 시각이라서인지 학원은 한가했어요. 남은 커피나 다 마시고 들어가자 하고 선 채로 10분은 더 있었던 것 같아요. 시험 시각보다 40분이나 일찍 왔으니까요. 시험 시작 30분을 남기고 시험 접수대에 섰습니다.
시험은 여기가 아닌데. 여기가 아니라고요? 네, 면허 시험장으로 가셔야죠. 하…. 그럼 이제 어떡해야 하죠? 여기서 직진하시면 7호선 나오니까 7호선 타고 노원역으로 가세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저에겐 창피해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냥 뛰었어요. 마침 학원 앞에 택시가 서 있더군요. 도봉면허시험장이요, 빨리요. 언제까지 도착하셔야 해요? 9시 30분이요, 아니 20분이요.
그 와중에 5분이라도 일찍 도착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제가 면허 학원 등록 시 받았던 유인물은 총 세 장이에요. 학과-장내 주행 수업일 예약 현황표 1장, 수강생 안내문(필독 요망!) 1장, 장내 기능 시험 시 감점 항목 및 실격 기준 1장. 저는 이 중에 무엇을 읽었을까요? 네, 수업 예약 현황표의 학과 교육 시각만 본 것입니다.
제대로 된 하루는 이래야 했어요.
1. 오전 9시 30분부터 3시간 동안 면허 학원에서 학과 교육을 받는다.
2. 교육 이수증을 받는다.
3. 면허 시험장에 교육 이수증을 제출한다.
4. 면허 시험장에서 별도로 이루어지는 1시간의 교육 이수를 면제받는다.
5. 신체검사한다.
6. 시험 접수를 한다.
7. 시험을 본다.
8. 합격하고 룰루랄라 집으로 돌아온다.
9. 낮잠을 잔다.
그러니까 그날 저는 학원에서 9시 30분부터 학과 수업을 이수하면 되는 것이었지만, 저는 접수원에게 '시험을 보러 왔다'고 말했고 저에게 그분은 시험장을 안내해 주셨고, 저는 수업도 듣지 않은 채 시험을 보러 갔던 것이며, 아침 댓바람부터 김칫국을 사발로 마셨던 것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저는 안내문을 읽지 않아 생긴 과오를 뒤늦게나마 바로 잡아보려고, 택시 안에서 안내문을 정독했습니다. 그때 눈에 들어온 준비물. '여권 사진 2매.' 물론 가져가지 않았지요. 그날은 상식이란 녀석은 저보다 먼저 외출해버렸고, 정신은…. 길바닥에 흘린 것 같아요.
저는 학원에서 하는 3시간의 교육을 이수했다면 면제받았을 1시간의 교육을 추가로 들었습니다. 교육이 끝난 후 신체검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곤 사진을 찍기 위해 근처 사진관을 검색해 그곳으로 향했지요. 급히 머리를 빗어 재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후드티를 가지런히 한다 해도 후드티는 후드티니까요.
고집이 세. 제가요? 고집이 세서 누구도 못 말려.
나이가 지긋하신 사진사께서는 묻지도 않은 관상을 봐주셨고, 교묘하고도 재빠르게 이루어진 얼평에 얼떨떨한 채로 나왔습니다. 생각할수록 이상한 기분은 점점 더 이상해졌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제겐 그런 기분을 곱씹을 겨를 따위 없었습니다. 다시 뛰었어요.
제가 시험장에 도착해 시험을 접수한 시각은 11시 20분. 시험 시작 시각은 11시 10분. (나 혼자만 안타깝게도) 12시 - 1시 시험 없음. 다음 시험 시작 시각 오후 1시. (집에 매우 가고 싶고 혼자 있고 싶고 이상하게 외로움)
일단 시험장을 나왔습니다. 1시간 넘게 남은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것들을 떠올렸지요.
1.
점심을 먹는다. (현명함)
2.
넷플릭스를 본다. (평범함)
3.
학과 시험 문제집을 들춰본다. (부끄러움)
4.
돈을 쓴다. (즐거움)
답은 4번. 그날 저는 무척이나 즐거워지고 싶었고, 아쉽지만 돈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적은 돈을 써서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을 만한 곳을 찾았습니다. 기본적으로 재미라는 것이 탑재되어 있지 않은 저는 돈을 쓸 곳으로 중고서점을 택했습니다. 그리곤 백팩이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많은 책을 사서 거북이 등이 된 채로 면허 시험장에 도착했습니다.
시험을 종료하시겠습니까?
아 괜히 떨리네.
시험을 종료하시겠습니까?
…..
시험을 종료하시겠습니까?
떨어지면 나 진짜 속상해.
합격하셨습니다.
지난 화요일, 저는 첫 장내 주행 연수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알았습니다. 대개 사람은 다른 실수를 하기보다는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것을요. T자 주차 구간 요령을 알려주시던 강사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도 못 외우면 시험 볼 생각도 말라고요. 그래서 외우려고요. 그리고 이제는 확실히 압니다. 안내문을 읽는 삶은 읽지 않는 삶보다 수월하다는 것을요. 그래서 안내문을 읽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운영멤버 헤이든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는 그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