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월간 안전가옥, 운영멤버들은 "빌런인데.. 살다보면 가끔 생각나는 빌런"이라는 주제로 작성해 보았습니다.
현실의 누구를 보면 너무 닮아서, 빌런이지만 이 시대에는 '사이다'가 되어 줄 것 같아서, 실제로 있을 것만 같아서, 그냥 너무 무섭고 싫어서, 아니면 나를 닮아서(?) 생각나는 그 빌런에 대해 적어봤습니다.
*대상 콘텐츠의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뤽의 빌런
<블랙 팬서>의 킬몽거
영화
킬몽거는 참지않지
확 다 그냥 엎어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열 받고 짜증나는 일이 많은 (요즘 시국 같은) 때면 더더욱. 아니 왜 나만 이렇게 열받는데? 아니 왜 우리만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데? 아 그냥 확 엎어버려? 물론 그 생각이 절차적 정의에 어긋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길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냥, 그냥 상상 속에서나마 그냥. 한 번 쯤은 엎어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럴 때면 생각나는, ‘아따 그냥 화악 다 엎어브러’ 했던 그런 캐릭터들이 있다. <블랙 팬서>의 에릭 킬몽거. 그가 대표적이다.
출처: imdb
킬몽거는 아주 전형적인 캐릭터다. 그의 분노는 (흑인 동포의 실상을 알면서도 구하지 않는) 와칸다를 향하고, 등장할 때부터 부글부글하며, 작중에서 한 번도 변화한 적 없이 그 부글부글함을 유지하다 결국 킬몽거의 최후로 이어진다. 어찌보면 아주 납작하고, 구태의연하고, 예측 가능한 캐릭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인정했으며, 한편으론 사랑했다. 주인공의 각성을 위해 쓰인, 뻔한 빌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형성은 사실 클래식이다. 핍박 받는 계급을 대표하는, ‘(우리를 짓눌렀던) 저들에게도 (우리가 당했던 것과) 똑같이 돌려주자’를 외치는 이른바 비뚤어진 ‘사이다’ 캐릭터. 비브라늄을 가진 와칸다의 힘을, 흑인들을 차별하는 이들을 향해 쓰자고. 세계 최고 수준의 군사 기술을 가진 와칸다니까, 세계 전체를 적대하자고. 20억 흑인들이 이미 당해왔으니, 저들을 향해 그걸 그대로 돌려주자고. 뻔하지만, 이 감정은 보편타당한 공감을 부른다.
아프리카의 (숨겨진) 초 선진국 와칸다가 전 세계에 보낸 스파이(워독) 중 하나였지만, 미국의 흑인차별 참상을 보다못해 조국을 배신하고 무기를 빼돌리려 했던 (그리고 그게 발각되어 즉결 처형당한) 은조부의 아들 은자다카. 그가 에릭 킬몽거였다. 킬몽거는 아버지 은조부의 사상을 이어받는다. 와칸다가 가진 힘을, 그들의 동포(흑인)를 위해 쓰지 않는 것은 위선이라고, 와칸다의 힘을 장악해 동포를 핍박하는 이들에 대항해야 한다고.
킬몽거는 직진이다. 참지 않는다. 아버지가 (그가 생각하기에 부당한 이유로) 당한 것이 있고, 그가 속한 인종 커뮤니티가 겪어온 것이 있고, 그걸 정면으로 맞받아칠 힘이 있다. 그래서 그렇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심플하고 직관적인 욕망. 속물적인 사람들에게 무시받던 최하층민 ‘아서’가 ‘조커’로 다시 태어난 과정도, 누구보다 뛰어났지만 생물학적으로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았던 ‘에릭’이 ‘매그니토’가 된 것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뭐 백번 양보해 킬몽거의 의도가 맞는지도 모르지만, 그런 킬몽거가 택하는 방식은 결국 테러다. 와칸다의 힘을 장악하기 위해 수 없는 살인을 자행해온 것은 물론, 그 장악한 힘을 행사하기 위해 ‘동포 중에서도 동포'라 할 수 있는 와칸다의 사람들을 태연히 살해한다. 와칸다의 역사나 맥락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은 전혀 보여주지 않고, 와칸다의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했던 건 바로 전세계에 비브라늄 무기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킬몽거가 그저 그런 테러범으로만 여겨지지는 않는 것은, 우리 마음 속 어쩌면 일부가 그 킬몽거의 마음과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끔찍한 역사를 겪어온 이가, 그에 대한 복수를 하는게 어쩌면 납득되는거 아냐? 알고보니 우리에게 이런 거대한 힘이 있는데, 그 힘을 우리를 위해 한 번 쯤은 써도 되는 것 아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보기에) 킬몽거가 싸우는 대상이 악습 같은데, 까짓거 픽션에서라도 한 번 쯤은 확 날려버려도 되지 않아?
코로나19 이후 사회적으로 긴장감이 매우 높아졌다. 괜히 나까지 예민해진다. 별 것 아닌 것에 짜증이 나고, 예전 같았으면 그냥 넘어갈 만한 사안도 거슬린다. 주변에 빌런이 도처에 난무한다. 티찰라라면 깊이 고민했을 것이다. 킬몽거라면 바로 총을 꺼내 쏴버렸을 것이다. 킬몽거의 해법이 사회정의와는 어긋난다는 것은, 안다. 알고 있다. 하지만 가끔 생각한다. 아 뭐야 킬몽거, 그 친구 나름..?
+
(이미지에 있는) 킬몽거와 티찰라의 결투 씬. 티찰라가 단창과 방패를 각 손에 든 것과 달리 킬몽거는 양 손에 공격 무기다. 참지않는 킬몽거의 면모를 보여주는 씬이다.
++
이 글을 쓰기 직전인 2020년 8월 28일, 작품에서 킬몽거와 대립했던 ‘티찰라’를 연기한 배우 채드윅 보스만이 세상을 떠났다. 주말 내내 보스만의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의 명복을.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운영멤버 뤽
"주제를 듣자마자 처음 떠올린 빌런은 원래 에바의 이카리 겐도였어요. ‘신지, 에바를 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