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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택트>의 루이즈 뱅크스

분류
운영멤버
스토리PD
작성자
2020년 9월 월간 안전가옥, 운영멤버들은 "다시 태어난다면 이 캐릭터로"라는 주제로 작성해 보았습니다. 나는 못하는 말을 하는 '사이다캐'라서, 돈이 많아 보여서, 행복해 보여서, 초능력이 있어서, 천재라서 등등.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혹은 남은 여생을 바꿀 수 있다면, 이 사람 혹은 이것(?)으로 살고 싶은 그 캐릭터에 대해 적어봤습니다. *대상 콘텐츠의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헤이든은 다음 생에

<컨택트>의 루이즈 뱅크스 영화
학부 시절에 내 주변 동기들은 희한하게도 일본에 관심이 많아서 일본어 공부에 빠져 있었다. 당시 일본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나로서는 일본어가 재밌다는 그들이 마냥 신기하게만 보였다. 일본어의 가타가나와 히라가나가 각각 몇 자 인지조차 몰랐던 때다. 좀 무식한 말을 해보자면, 대충 생각해보더라도 한글의 받침 개념이 없는(있긴 있다. 그땐 몰랐다.) 글자를 조합해 개별 단어를 구분하려면 조합의 수가 적을 수밖에 없고, 종국에는 단어들이 길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싶었다. 마치 영어단어처럼. 이 말이 아주 틀린 것 같진 않은 것이 일본어에는 같은 발음의 단어들이 많기도 하고, 문맥을 모르는 상태에서 한자로 뜻을 구분해주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까. 어쨌든 일본어에 문외한이던 나는 듣는 것만으로는 그게 그 단어 같고 그걸 공부하는 동기들이 신기하기만 했다.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능력과 별개로 나는 그저 언어 자체에 쬐금 관심이 있어서 건축학도 주제에 잘 이해도 못 하는 소쉬르의 책을 읽으며 랑그니 빠롤이니 했다.
그러다 일본어를 공부하기로 했던 건, 내가 갑자기 휴학을 하게 되면서 부터다. 일 년 휴학 기간 동안에 뭐라도 해야만 했다. 갑자기 빈 시간을 무엇으로라도 채워야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왜 일본어가 떠올랐는지는 알 수 없다. 동기들이 공부할 때 귀동냥으로나마 일본어가 한국어와 어순이 같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던 터라 다른 언어에 비해 습득이 빠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무작정 공부하기 시작해 복학해서는 교환학생으로 오사카에 가게 되었다.
순수하게 자발적으로 시작한 외국어 공부가 그토록 재밌는 일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고, 다른 언어로 다른 나라 사람들과 소통하는 경험이 참 좋았다. 물론 어려움도 있었다. 오사카나 교토 사투리가 있다는 사실을 오사카 땅에 떨어지고 나서야 알게되어서 그땐 참 당황스럽고 막막했다. 그 부담이 어찌나 컸던지 일본에 가서 며칠간은 일본어로 된 꿈을 꾸고 잠결에 일본어로 중얼거렸다는 말을 룸메이트가 해줘서 알았다. 그것 조차 나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일본어를 공부하면서 일본 사람들은 부러 말을 길게 늘여한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뭔가 부탁을 하거나 허락을 받거나 윗사람에게 말을 전해야 할수록 문장이 조금 길어졌다. 그렇다고 중언부언한다는 것이 아니라 수동태를 쓰거나 겸양어를 써서 동사 부분을 길게 늘려 놓는다. 그건 마치 말로 하는 뒷걸음 같달까. 아니 상대방의 감정적 동요를 최대한 늦추려는 언어적 태도같달까. 예를 들면 이런거다.
고노 홍 욘데모 이이데스까? > 이 책 읽어도 될까요?
고노 홍 요마세테 이따다케마스까? 읽게 해 받을 수 있겠습니까? > 읽게 해주시겠습니까?
드라마틱한 변화는 아니더라도 발음해보면 문장이 미묘하게 길게 늘어진다는 느낌이 있다. 평소보다 말이 길어지는 동안 상대방의 표정이나 의중을 살필 시간도 늘어난 느낌이었다. 뭐, 이건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나로서는 일본어를 쓰면 쓸수록 그랬다. 말로 뒷걸음질치는 느낌. 우리말 표현에도 있듯이 꺼내기 어려운 말일수록 돌고 돌려 말하는 것처럼 정면에서 약간 빗겨선 느낌 아니면 약간 우회하는 느낌을 일본말에서는 문장단위로 하는 것 같았다.
이 느낌은 비로소 일본에 가서 생활을 하면서 더욱 자연스럽게 체화되었는데, 남에게 폐끼치길 싫어하는 일본 문화에 속해 있을수록 이런 말의 형태가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 습관이 편리하기도 했다. 나는 한국에 와서도 한동안은 그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아무튼 외국어> 속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배운다.’
적어도 내가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 ‘신기하고 재밌고 즐거운’ 이유는 소통보다는 말 속에 스며있는 문화가 작동하는 것을 볼 때의 즐거움에 가까운 것 같다. 모국어 문화 속에서 경험한 적 없는 또다른 체계가 있다는 것. 언어에 숨어있는 그 나라 사람들의 사고체계를 알게 되고 그것이 녹아있는 사회가 굴러간다는 것을 확인하는 즐거움.
<아무튼 외국어>의 저자처럼 나도 3개월씩 외국어 사이를 여행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가 정말 마음에 드는 외국어가 있다면 한동안 눌러앉아 보기도 하고.
그래서 다음 생에 태어나면 무엇이 되고 싶은가 하면, 언어학자가 되고 싶다. 그것도 외계 언어를 배우는 언어학자, 영화 Arrival 속 루이즈 뱅크스같은 사람! 물론 루이즈 뱅크스 교수가 실존한다면 나의 이 천진하기만 한 욕구에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겠다.
영화 어라이벌은 어딘가 정체되어 있는 것 같을 때 내가 종종 다시 찾아보는 영화다. 영화 안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를 보면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시도 정도는 해볼 마음이 생겨서 도움이 된다.
루이즈는 헵타포드의 언어를 통해 그들이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아쉽게도 그들의 세계관에 푹 빠지기 전에 그들이 떠나가 버렸고 그래서 반쪽 짜리가 세계관을 갖게 되었지만, 그 덕분에 자신의 미래를 알게 되었다. 자신의 딸이 어린 나이에 죽는다는 가슴 아픈 미래를.
헵타포드들은 자유롭지 않지만 속박당한 것도 아니다. 적어도 우리가 이 개념들을 이해하는 방식으로는 그렇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무력한 자동인형인 것도 아니다. 헵타포드의 의식 양태를 특이하게 만드는 것은 단지 그들의 행위가 역사상의 사건과 일치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의 동기 또한 역사의 목적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들은 미래를 창출해내고, 연대기를 실연해보이기 위해 행동한다.
동기와 역사의 목적이 일치한다는 것, 수행되어야만 하는 대화가 있고 역사의 흐름 속에 완벽히 종속되어 있는 개별 행위가 있다는 개념을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런 세계관을 조금이나마 경험한 루이즈는 적어도 삶을 다르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영화의 마지막에는 극적인 선택의 기로에 놓인 루이즈를 보여준다. 자신의 미래를 알고 있으면서도 루이즈는 이안을 껴안고야 만다. 이안을 껴안는 행위가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궁금하다. 헵타포드식 생각 방식을 조금이나마 경험해본 루이즈에겐 우리가 하루를 보내기 위해 하는 작은 행위와 대화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의미없다고 여겨지는 행동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헵타포드를 몰랐을 때와는 분명 다르게 여겨지지 않을까. 시간, 행위, 대화 모두가.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을 예상하는 것조차 인간이 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 세계를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캐릭터도 살고 싶은가?”
이 어려운 질문에 답을 찾기란 참 쉽지 않았다. 픽션 속 인물들은 종국에는 승리하지만, 그전에 위기를 맞고 고전하고 엎어졌다가 일어났다가 다시 고꾸라지니까. 모두가 그렇지 않겠지만 대부분 이런 고생은 마다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닌가. 그렇다면 그들이 한 경험 중에 탐나는 경험은? 이 생에서는 해볼 수 없는 그런 경험을 한 캐릭터는 누가 있지? 그러다가 결국 루이즈 뱅크스를 떠올렸다.
다시 살수만 있다면, 루이즈 뱅크스처럼 낯선 것과 조우하는 경험을 나도 해보고 싶다. 파이오니어나 최초의 인간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저 지금껏 본 적 없는 미지의 생물체를 어떤 정보도 없이 맞닥뜨린 인간. 하나씩 정보를 교환하며 새로이 알아가는 과정. 두려움과 막막함에도 종류가 있다는 것을 경험해보고 싶다.
어쩌면 지금도 지구 어딘가에서는 어떤 분야의 최전선에 있는 연구자들 중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나는 정말로 헵타포드를 만나고 싶다.
이 영화를 연출한 드니 빌뇌브 감독은 또다른 SF 영화 <듄>을 연출했다고 한다. 코로나 때문에 개봉이 내년 초로 밀려버렸지만, 원작을 이토록 영화적으로 잘 소화한 작품을 만든 감독의 작품이기에 다음 영화는 어떻게 만들어졌을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운영멤버 헤이든
"테드 창 작가님, 드니 빌뇌브 감독님. 모두 만수무강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