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베 미유키의 흑백의 방 시리즈에는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나옵니다. 작은 방에 앉아서, 타인이 겪은 괴이한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시리즈를 상당히 좋아합니다. 원체 요괴나 괴담을 좋아하니깐요.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니 최고잖아, 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오치카처럼 삶의 굴곡을 견뎌낼 재주도 없고, 좋은 청자가 될 자신도 없는 주제에 말입니다. 흑백의 방 시리즈의 좋은 점은, 이야기를 하는 쪽만이 아니라 듣는 쪽도 위로받는다는 점입니다.
종종 다시 태어나면 누구로 살아보고 싶냐 하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대학교 때 교양수업의 교수님은 무려 이 주제로 리포트를 내 주셨더랍니다. 아마 불교학의 이해란 과목이었을 겁니다. 이 리포트를 쓰면서 저는 전공 리포트를 쓸 때보다 머리를 쥐어짜야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게, 저는 다시 태어나고 싶지가 않습니다. 사람으로는 더더욱. 어릴 때 저 질문을 처음 받았을 때부터 ‘누가 됐든 굳이 사람으로..?’ 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저렇게 썼다가는 학점이 안 나올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쓰면 사람을 싫어하냐는 말을 들을 것 같고, 그럼 저는 아니라고 할 테고, 그럼 왜 사람으로 태어나기 싫냐는 돌고 도는 뫼비우스의 문답에 빠질 것만 같았습니다. 진짜로 있었거든요. 그런 일이. 그 문답의 결과는 상대가 제게 ‘이상한 사람’이라는 도장을 쾅 찍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지금도 저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게, 왜 사람을 싫어한다로 연결되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여하튼 무언가 써 내야 했던 저는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뜻하지 않은 자아성찰의 시간이었지요. 그리곤 결국, 사막에 뜨는 달이 되고 싶다고 썼습니다. 사막을 오고가는 사람들의 노랫소리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을 것 같다고. 이 미묘한 리포트는 딱 재수강을 하지 않아도 될 학점을 받았습니다. 지금 다시 생각하면, 달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자꾸만 달 정복을 외쳐대는 걸 보면 달의 생도 좀 고달파 지겠구나 싶거든요. 하지만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합니다. 굳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조금 더 잘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흑백의 방 말입니다. 그 작은 방은, 그 시대의 책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책이 비싼 시대니깐요. 괴담을 털어놓는 쪽은 지금 같으면 작가인 셈입니다. 오치카는 독자인 거죠. 작가가 자기가 쓴 책을, 독자 앞에서 낭독하는 셈이니 일종의 저자 낭독회인 셈입니다. 그것도 단 한 사람만을 위한 낭독회. 그 이야기가 아무리 이상해도 독자는 모두 받아들여 주는 낭독회. 작가에게도 독자에게도 참 상냥한 시간 아닐까요. 역시 그 작은 방은 좋습니다.
저는 지금 안전가옥과 새로운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조금은 기묘할지도 모르는 짧은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준비하면서 조금은 더,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타인의 말을 듣지 못하면 쓰지도 못할 테니깐요. 작가와 독자는 그런 면에서 역시 한 몸이지 싶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흑과 백의 방은 아닐지라도 조금은 정돈된 방에서 글을 쓰려고 청소를 하고 있습니다. 검고 흰, 그 사이의 정의되지 않은 색과 같은 이야기로 인사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일단 초고라는 이름의 정리를 끝내고 오겠습니다. 글을 읽어드릴 날을 꿈꾸며 이번의 인사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총총.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파트너 멤버 범유진
"잠 안 올때 듣겠다고 오디오북을 사놓고 들은 적이 없습니다. 늘 너무 잘 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