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에는 그 장르를 향유하는 집단이 공유하는 단어와 문법이 있다. 판타지 소설에서 작가가 용이 나오는 장면을 처음 쓰더라도, 작가는 용에 대한 묘사를 필요 이상으로 상세하게 할 필요가 없다. 용의 생활사를 설명하고 용의 생태적 역할을 그릴 필요가 없다. 판타지 소설이 소구 대상으로 잡는 독자들은 전부 마음 속에 자신만의 용의 원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용이라는 원형은 오래 장르를 즐기면서 독자들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자리잡는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마음 속에 있는 ‘고양이'의 형태를 물어보는 것과, ‘용'의 형태를 물어보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아마도 고양이의 형태에 대해 사람들이 합의하는 바가 더 많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양이라고 말할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지만 그 점이 주요한 매력인 타고난 사냥꾼의 모습을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용은? 일단 비늘이 났다는 정도의 아주 기초적인 선을 제외하고서는 도저히 합의가 안되리라. 어떤 사람들은 커다란 날개를 달고 하늘을 가르는 거대한 붉은 용을 상상할 것이고, 동양 문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날개 없이 미끈하고 우아하게 공중을 유영하는 용을 생각하리라.
내 마음 속에 있는 용의 원형은 절대적으로 <워크래프트> 시리즈에서 왔다. 2002년 출시된 <워크래프트 3>은 당시 초등학생이던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수많은 종족들이 생존과 번영을 위해 분투하는 세계에서 고뇌하는 인물들은 내 어린 정신이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치게 매력적이었다. 백성을 역병에서 수호하려다 선을 넘고 복수심에 불타 결국 리치 왕이 되는 아서스 왕자라든지, 악마의 힘을 받아들인 대가로 동족들에게 버림받았으나 동족들을 다시 지키기 위해 악마의 힘을 얻는 일리단이라든지.
그러니까, 내게 SF(그 중 스페이스 오페라)의 원형이 스타크래프트라면 판타지의 원형은 워크래프트인 것이다. 이번에 안전가옥 쇼-트 첫번째 시리즈로 출판된 내 단편집 <땡스 갓, 잇츠 프라이데이>의 마지막 두 작품은 워크래프트가 내게 심어준 판타지 세계관에 바치는 송가였다. 마법과 환상 생물이 존재하는 현대 세계라는 세계를 그리면서, 관악산에 둥지를 차린 용이 보라색 비전 마법을 흩뿌리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나는 마음 속에 워크래프트의 용들을 떠올렸다.
그래서 나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도 대격변 시점까지 했다. 하지만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MMORPG 게임 특유의 한계가 있었다. 나는 워크래프트 3에서 했던 것처럼 세계의 영웅들을 조종하고 역사의 한복판에 서고 싶었다. 하지만 MMORPG 게임인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플레이어는 역사의 관측자가 될 뿐, 진짜 세계의 중심 영웅이 될 수는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하니까! 대학생이 된 나는 현실의 좀 더 중요한 문제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워크래프트 세계에 대한 동경은 내 무의식 속에 고이 접어 넣었다
작년 워크래프트 3이 리마스터링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야말로 눈이 번쩍 뜨이는 소식이었다. 블리자드는 그 서사시적인 이야기를 손보고 게임플레이도 조정한다고 말했다. 아름다운 새로운 그래픽도 약속했다…
실제로 그들이 공개한 ‘스트라솔름 정화' 시나리오의 플레이 영상은 충격적이었다. 완전히 새로운 지도가 만들어져 있었고, 이전보다 훨씬 깔끔하고 재미있어 보였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블리자드의 역사적 목적이 마침내 이루어진다고 말이다. 블리자드는 <워크래프트 3: 리포지드>를 출시하기 위해 탄생한 회사였다… 그들의 운명은 그렇게 안배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들은 그 위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뚜벅뚜벅 걸어나간다고…
물론 결말은 예정된 대로 비극적이었다. 블리자드는 00년대 초반에 내 정신을 인질로 잡은 이후, 10년 넘게 내 뒤통수를 치고 있다. 뭐 사실 그렇게 어릴 때 정신을 예속하는 것이야말로 컨텐츠 산업의 본질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이번에 블리자드는 했던 약속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다. 이야기를 고치고 개선하겠다던 허풍은 오직 시연회 때 공개 된 시나리오에만 적용되었으며, 아예 검수를 하지도 않은 듯한 수많은 버그가 난립했다. 심지어 이 게임은 사무용 컴퓨터도 CPU 멀티코어를 쓰는 세상에서 당연하게 코어 하나만을 사용한다.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하는 친환경 게임인걸까?
사실상 유일한 변경점이었던 그래픽 개선은… 오, 신이여, 이 부정한 자들을 용서하소서.
2002
2020..
믿기 힘들겠지만(사실 나도 아직 완전히 잊지 못하고 있다) 위가 2002년에 나온 게임이고 아래가 2020년에 나온 게임이다.
블리자드는 선택받은 회사였다. 예언에 따르면 블리자드야말로 지나치게 성장한 후 초심을 완전히 잃은 추악한 게임회사들을 무찌르도록 예비되어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게임 산업에 어둠이 아니라 균형을 가져오도록 할 존재였단 말이다. 블리자드는 나의 형제 같은 존재였고, 나는 블리자드를 사랑했다…
가장 비극적인 사실은, 나는 이렇게 추악한 게임을 재미있게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 다이아몬드는 설령 뒷간에 빠져도 여전히 다이아몬드다. 위대한 걸작을 리메이크했기 때문에 이 게임은 본질적으로 재미있고 각본의 대사 하나하나가 오뒷세이야에 버금가는 가치가 있다(오롯이 심너울 기준임을 밝힘)! 그리고 그 충격적인 사실이 나를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 마치 천연기념물을 붙잡아 살을 발라내고 그 아름다운 뼈대 위에 합성수지로 된 살점을 치덕치덕 붙인 것 같은 불경스러움에 지극한 구역감을 느끼며, 나는 오늘도 워크래프트를 실행한다...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파트너 멤버 심너울
“추억을 버려야 비로소 성장한다는 것을 어쩌면 블리자드는 알려주고 싶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