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좀 이상한 기분이 드는 날이었습니다. 눈을 떠 보니 이른 햇살도 없는 구름 낀 새벽이었는데 5시더군요. 인스타로 친구들 근황을 살피고 내게는 없는 고양이와 나와 거리가 먼 자연 속 캠핑, 휴가 장면 등을 구경했어요. 나도 뭔가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어요. 생각을 멈추고, 세수한 뒤 선크림이 내장된 로션을 치덕치덕 바른 채 어제 입었던 츄리닝 바지와 반팔티를 꺼내 입었습니다.
핸드폰을 들고 갈까 하다가 핸드폰은 충전시키고, 시계라도 찰까 하다가 내가 얼마나 오래 뛰겠나 싶어 손을 가볍게 했어요. 카드 지갑은 점퍼에 넣고 뛰다가 떨어뜨릴까 봐 지퍼를 잠갔고요. 혹시 목이 너무 마르면 한강의 편의점에서 물이라도 사 마시거나 멋지게 아침 메뉴를 먹겠다고요.
집에서 한강까지 나가는 길에는 수많은 인쇄 공장, 물류 창고, 카페, 재개발 구역 틈 사이에 있는 신기한 가게들이 있어요. 자칫 한눈팔면 한강으로 가는 빠른 길로 진입하지 못하죠. 올해 처음 한강으로 달리러 나가던 길에는 너무 신기한 풍경이 많아 사진을 찍느라 바빴어요. 그래서 아예 뛰지도 못했죠. 오늘은 한눈팔지 않고 몸에 집중하며 걸었습니다. 평소보다 엄청나게 빨리 한강에 도착한 것 같더라고요.
새벽의 한강은 놀랄 정도로 사람이 많아요. 뛰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 걷는 사람, 앉아 있는 사람, 낚시하는 사람... 오늘은 명상하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명상하는 사람이 자리 잡은 깨끗해 보이는 풀숲의 다른 벤치에 앉아서 명상 코스프레를 하며 눕고 싶었는데 먼저 온 이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장소만 눈에 담고, 준비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머리에 헤어밴드까지 한 내 모습은 누가 봐도 마라톤을 준비하는 러너의 느낌입니다. 남산타워를 바라보며 성수대교까지 뛸까 더 가까워 보이는 영동대교와 청담대교까지 뛸까 고민되더라고요. 체력이 좋았더라면 멀어 보여도 성수대교 방향을 뛰었을 텐데 시작부터 무리하고 싶지 않았어요.
자주 뛰어 보겠다 마음먹은 지 2년이 넘어가는데 아직 주 2일 이상 꾸준히 뛴 적은 없어요. 그간 읽은 러닝 관련 책은 수십 종이라 초심자는 절대 무리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걷는 느낌으로 뛰어야지 시작했는데 어느새 다리가 막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더 빨리 달리고 싶은 마음을 조금 누르고 영동대교까지 쉬지 않고 뛰었다가 숨을 고르며 다시 청담대교에 도착했습니다.
달리기를 멈춘 곳은 뚝섬유원지로 밤이면 청춘남녀의 데이트부터 농구 하거나 운동하는 사람들로 바글바글 한 곳이에요. 이곳저곳 쓰레기가 많은 풍경을 피해 잠시 ‘여기서 바로 집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아까 그 명상하던 사람 자리까지 다시 돌아가서 앉아보고 왔던 길로 돌아갈까?’ 고민하다가 밤새 피크닉으로 얼룩진 유원지 바닥을 피하고자 러닝을 시작한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뛸 땐 무릎이 괜찮은지 허리가 아프지 않은지 신경 쓰느라 아무 일도 떠오르지 않았는데 막상 돌아가는 길은 천천히 걸어서 그런지 오만 생각이 나더군요. 시간여행을 하듯 내가 선택한 수많은 길이 떠올랐어요. 경쟁의 게임이 아니라 협력의 게임을 하는 이 시대에 나 자신이라도 가볍게 매 순간을 여행하듯 살아야겠다 싶었어요.
어차피 저는 포기하지 않을 테니 천천히 내 리듬대로 걷다 뛰다 해도 결승점에는 도착할 수 있을 거 같더라고요. 저 멀리 보이는 대교에 일찍 도착하겠다는 마음이 뛰는 내내 저 자신을 힘들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걷는 동안, 스스로 과정을 충분히 만끽하며 만들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려 봤어요. 성과도 성과지만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좋은 과정을 거치고, 좋은 협업의 순간(magic hour)을 만들어 낼 때, 삶의 큰 기억 조각으로 제 마음에 남아있더군요. 함께 한 이들과 나눈 실없는 농담이 많이 떠올랐어요.
움직임이 시작될 때, 정지에너지와 운동에너지의 크기가 같으면 물체는 움직이지 않고 운동에너지가 조금이라도 더 클 때 운동을 시작한다고 해요. 누워있고 싶은 마음보다 뛰고 싶은 마음이 들기까지 약 3년이 들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변하는 걸 보면 앞으로 제가 만들 이야기도 변하지 않을까 싶어서 설렙니다. 어차피 할거라면 좋은 자세로 꾸준하게 하고 싶어요.
러닝도 글쓰기도. 롱런!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운영멤버 레미
"나를 움직이게 할 만큼, 내 마음에 딱 달라붙은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한 레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