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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외계인의 짓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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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 이야길 하려고 했어요. 제가 그 영화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 플러그에 클립을 끼워 정전을 일으키는 씬이라고요. 그런데 그 문장을 쓰고 나니 거기서 무슨 말을 더 이어서 써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막막한 와중에 저는 톰 스웨터리치의 <사라진 세계>를 읽었고, 결국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TV드라마 <엑스 파일>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먹었어요. 둘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궁금하시다면 <사라진 세계>를 읽어보시길.
<엑스 파일>은 저에게 올타임 넘버원인 드라마예요. 매주 월요일 밤 KBS에서 이 드라마가 방영될 때면 저는 어김없이 TV앞에 앉아 비디오테잎을 넣고 녹화 버튼을 누르곤 했죠. 아직 꼬꼬마 초등학생이었던 94년에 방영이 시작되어 마지막 9시즌이 2002년에 종영했으니 사실상 제 유년기를 함께 보낸 짝이나 다름없어요. 어린시절 내내 제가 외계인 음모론에 빠져 지낸것도 전부 이 드라마 때문일 겁니다.
당시엔 워낙 유명했던 시리즈여서 사람들은 이 드라마를 보지도 않고 이런저런 말들을 얹곤 했는데, 골수 팬인 저로서는 그게 항상 불만이었어요. 대표적인 오해는 이런 것들이죠.
첫째로, 사람들은 멀더가 "스컬리, 이건 외계인의 짓이에요." 라고 떠들고 다니는 줄 알아요. 제가 기억하는 한 멀더는 이런 대사를 하지 않았어요. 가설을 세우는건 오히려 과학자인 스컬리의 몫이었죠. 스컬리가 초자연 현상을 설명할만한 과학적인 이론을 제시하면 멀더는 언제나 그걸 반박하기만 해요. 슬슬 열이 받은 스컬리가 "그럼 멀더 생각은 어떤데요?" 라고 물어도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을 뿐이죠. 멀더는 자기 생각을 잘 이야기해주지 않아요. 사실 멀더는 좀 겁쟁이거든요. 혹시나 자신의 생각이 틀릴까봐 두려운 거죠.
둘째로, 사람들은 이 드라마가 뜬구름만 잡다가 결론도 없이 끝난다고 말해요. <엑스 파일>은 원래 그런 드라마라면서요. 제가 기억하는 한 대부분의 에피소드는 결말이 명확해요. 꽤 그럴싸한 설명을 붙여서 마무리를 지어주죠. 그래야 사건이 종결되니까요.
마지막으로, 흔히 이 드라마가 외계인과 초자연현상이 나오는 호러/스릴러 장르의 이야기라고 알려져 있는데 실은 그렇지 않아요. 이 시리즈는 코믹부터 로맨스까지 모든 장르를 옴니버스로 다뤄요. 어떤 에피소드에서는 배를 잡고 웃다가, 어떤 에피소드에서는 살떨리게 식은땀을 흘리죠. <엑스 파일>이 위대한 시리즈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이 시리즈는 미국 TV드라마의 모든 장르 요소를 자유롭게 활용한 총집편이었어요. 이쪽 장르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이 드라마를 꼭 한번 찾아보시길 추천드려요. 지금 봐도 재미있습니다.
<엑스 파일> 이야기를 하자면 정말 한도 끝도 없으니 이쯤 하고, 저의 최애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이달의 월간 안전가옥을 마칠까해요. 아, 물론 정부의 음모에 맞서는 메인 에피소드들은 제외하고 골랐습니다. 그 에피소드들은 당연히 전부 다 재미있으니까.
2x19 구축함의 비밀
해군 구축함의 승무원들이 모두 늙은 채로 발견됩니다. 이를 수사하기 위해 파견된 멀더와 스컬리도 같은 현상에 빠지게 되고, 두사람은 급속도로 나이를 먹으며 이른 최후를 준비하게 됩니다. 저는 이 에피소드에서 언급되는 북유럽 설화가 참 좋았어요. 종말에 관한 이야기인데, 천천히 쌓여가는 하얀 눈에 의해 모든 세상이 덮이고, 빛을 잃은 세계는 영원한 어둠에 조용히 잠기게 된다는 내용이에요.
3x12 외계에서 온 불청객
외계에서 온 살인 바퀴벌레떼가 시골마을 주민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멀더와 스컬리는 반신반의하며 이 벌레들을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이 에피소드의 압권은 이야기 절반 즈음에 삽입된 짓궂은 장난질인데요. 시청자가 한참 줄거리에 몰입할 즈음 화면 위로 시커먼 무언가가 휙 지나갑니다. 네. 바퀴벌레가요. 진짜로 집에 바퀴벌레가 나타난 줄 알고 깜짝놀란 사람들이 참 많았죠… 멀더의 독백으로 끝나는 유머러스한 결말도 정말 좋습니다.
3x20 호세의 소설
호세 청이라는 사람이 스컬리를 인터뷰하며 외계인 납치에 대해 '소설을 씁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어쩐지 괴상하고, 형광 쫄쫄이를 입은 외계인이 튀어 나오는가 하면, 인형옷 지퍼가 달린 가짜 외계인 부검 테이프가 등장하고, 멀더는 정부의 하수인에다 꽥하고 이상한 비명을 지르는 삼류악당이고… 스토리는 점점 엉망진창으로 흘러갑니다. <엑스 파일>을 스스로 비틀어 패러디하는 개그 에피소드인데, 전체 시즌 중에서 가장 배를 잡고 웃었어요.
6x02 악마의 질주
해군의 비밀 실험에 노출된 사람들에게 이상한 부작용이 생깁니다. 점점 빠른 속도로 이동하지 않으면 머리가 터져 죽게된다는 거지요. 멀더는 마지막 생존자를 차에 태우고 계속해서 고속도로를 달립니다. 스컬리는 그동안 치료법을 찾아 해군을 추궁하고요. 얀 드봉의 영화 <스피드>에서 여러모로 영감을 받은 듯한 에피소드입니다. 어릴적 본방으로 시청했을땐 살떨리게 긴장하며 봤던 기억이 나요.
6x03 버뮤다 삼각지대
이제는 죽은 떡밥인 '버뮤다 삼각지대' 이야기입니다. 카리브해에 있는 버뮤다섬을 꼭지점으로하는 삼각형 공간을 지나간 배들이 종종 사라졌고, 한참 미래에서야 다시 나타났다는 괴담이요. 이 에피소드에서는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사라졌던 나치의 배가 다시 나타나고 멀더가 그 배에 오릅니다. 어째선지 멀더는 과거로 시간여행도 하게 되죠. 언제나 그렇듯 스컬리는 한박자 늦게 멀더를 뒤쫓아옵니다. 멀더와 스컬리는 같은 배의 같은 공간을 거닐지만 서로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멀더는 과거에 있고 스컬리는 현재에 있으니까요. 두사람이 같은 공간의 다른 시간대에서 행동하는 장면들을 교차하며 보여주는 편집이 압권이에요.
6x20 인간이 된 외계인
인간 사이에 숨어든 외계인이 야구에 푹 빠져 메이저리그 야구 선수로 활동한다는 훈훈한 이야기입니다. 딱히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아닌데, 멀더와 스컬리가 함께 야구장에서 배트를 휘두르는 마지막 장면이 로맨틱해서 좋아해요.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파트너 멤버 이경희
"그런데 갑자기 제가 왜 이런 글을 쓰고 있죠? 이건 외계인의 짓이 분명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