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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듀 연무장길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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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PD
19년 9월, 소나기 쏟아지고 난 후 옥상에서
2020년을 맞이한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마치 데자뷔처럼 작년 1월처럼 여러 일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큰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었던 건 아무래도 겨울 공모전 심사였지만, 그만큼의 심적 부담감이 주었던 것은 새로운 일터로의 이사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공간으로 이사를 하고, 업무를 보기 시작한 지 이제 대략 일주일 정도 되어갑니다. 변화의 정도와 방향이 여러모로 만족스럽기에 적응도 무리 없이 진행되었고, 사실 이사 자체도 큰 문제 없이 순식간에 처리되었죠. 더불어 지하철로 한 정거장 건너편의 새로운 성수동을 발견해가는 점들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곧 다가올 봄이 되면 서울숲 산책도 무척 기대되고 있습니다.
​다만 연무장길 101-1에 있었던 안전가옥, 떠나 온 그곳에 대해 뭔가 조금의 기록이라도 남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몇 가지의 기억을 끄집어봅니다.
​안전가옥을 처음 가봤던 때는 18년 5월쯤이었습니다. 안전가옥이란 흥미로운 공간이 있다는 건 이전부터 알고 있어서 가봐야지 가봐야지 하다가 방문이 미뤄지고 있었는데 당시 H모 작가님과의 미팅 장소로 안전가옥이 결정되었습니다.
​그 날은 비가 많이 내렸고, 매우 어두웠습니다. 평소에 지도를 보고 길을 잘 찾는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거리상 이때쯤이면 간판이나 건물이 나타나야 하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군요. 미팅 시간은 거의 다 되었고, 비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고, 낯선 동네에서 주춤거리고 있을 때 거대한 철문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미약한 조명이 길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공간을 제대로 둘러 볼 여유도 없이 바로 미팅을 하고, 라이브러리는 들어가 보지도 못한 채 여전히 쏟아지는 비를 뚫고 돌아간 것이 안전가옥이란 곳과 처음으로 마주했던 때였죠. 주말에 한번 시간을 내봐야지 속으로 생각해봤지만 스스로도 지킬 수 없는 약속임을 알고 있었죠.
​그렇지만 운명의 축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알 수 없는 뭔가가 작용했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L모 작가가 안전가옥에서 작가살롱이란 걸 해보고 싶다,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연락을 주고받았고 약 한 달 뒤 그해 6월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비가 오지 않았고,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웬만한 사람보다 웃자란 억새가 무릎 높이 정도로 파릇하게 피어있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가벼운 마음으로 방문했었는데 뤽과 그렇게 길게 이야기를 나누게 될 줄 몰랐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기록으로 남아 있는 줄도 몰랐었죠…)
​다음 방문도 업무차 두 차례 정도 이어졌습니다. 그때는 보다 내밀하게 공간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벙커와 거울방도 볼 수 있었고, 라이브러리에서 책과 나무 서가가 만들어내는 특유의 향과 분위기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꽤 힘든 시기를 보내던 중이었는데 다음 스텝을 안전가옥 라이브러리에서 준비해봐도 좋겠다 라는 생각을 점차 가지게 되었고, 여러 선택지가 강요되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해 9월 결국 안전가옥에 닻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때의 심경이랄까, 여러 소회를 제 첫 월간안전가옥에 남겨두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그 뒤로, 시간이 그야말로 쏜살같이 흘러갔습니다. 정량적으로 보면 크고 작은 행사와 매달 촘촘하게 진행되었던 작가님들과의 작품 개발 미팅, 이제 천천히 베일을 벗고 출간되고 있는 책 종수 등이 있겠고, 정성적으로 보면 어설펐던 라떼 실력과 하얗게 변한 억새밭의 눈 치우기, 발이 꽁꽁 얼 것 같았던 추위, 언제나 잊지 않고 방문해주는 고양이들과 인사하기, 한여름 정글같던 정원, 3층 회의실 화이트보드 벽면에 가득채워졌던 검은 글씨, 가끔 옥상에 올라가 보던 하늘과 우연하게 봤었던 불꽃놀이, 라운지에서의 대화, 벙커에서의 탁구, 망고의자에서 마시던 시원한 맥주, 웃음소리와 치열했던 회의… 연무장길 101-1에 있었던 안전가옥이란 공간 아니 장소를 쉽게 잊을 수는 없겠죠.
​보통 공간(Space)과 장소(Place)는 비슷한 의미를 지닌 단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공간은 3차원적인 단순한 물리적 영역으로 정의되는 개념인 반면, 장소는 맥락(Context), 즉 인간의 경험과 시간, 문화와 가치관 등을 포함하면서 형성되는 구체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장소에 대해 살펴보면, 장소는 시간이 개입된 공간입니다. 장소는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며 관계를 맺는 곳이기도 합니다. 장소는 각 개인들이 가치를 부여하는 안식처이며, 애정과 안전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특정한 시간과 공간 안에 현존하는 존재라고 파악했었는데 이러한 시간과 공간 안에 개인의 취향과 역사가 배어 있는 곳이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수동 연무장길 101-1, 그곳이 제게 그런 장소였습니다. 사계절 다른 모습을 보여줬던 억새 정원과 편안한 쇼파가 있던 라운지, 수 천 권이 넘게 있던 라이브러리와 벽장 서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누구나 놀라게 하던 벙커와 그 놀라운 거울방, 어찌보면 독서실같던 2층 10칸의 멤버십 자리와 언제나 치열하게 이야기가 오갔던 3층의 회의실.
​그곳에서 안전하게 일 할 수 있었습니다. 보다 안전하게 작가님들을 위해 말을 건넬 수 있었습니다. 그 공간에서,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언제나 재미있고, 의미있는 이야기들을 꿈꿀 수 있었습니다.
​이제 보다 단단한 장소에서, 그리고 다양한 토양에서 더욱 새로운 이야기들을 그려보겠습니다. 더더욱 창작자들이 안전하게 창작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연무장길이 아닌 뚝섬로에서, 창작자가 절필을 선언하게 하는 그런 곳이 되지 않도록 열심히 좋은 맥락을 쌓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아듀, 아디오스, 굿바이, 짜이 지앤 그리고 안녕, 안녕히 연무장길 101-1.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운영멤버 테오
"연무장길에서는 개인 책상 없이 근무를 했었는데요. 이제 각자 자리와 데스크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데스크가 움직이네요. 네, 자랑하고 싶었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