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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

분류
파트너멤버
작성자
시아란
1.
업무 스트레스에 짓눌린 와중 장편 원고 스트레스에도 신음하는 나날입니다. 예정한 마감날이 성큼성큼 걸어오는데, 두뇌를 회전시키는 정신력이 수시로 고갈되곤 합니다.
짧은 시간에 최고 효율의 휴식을 얻기 위해, 오래동안 스팀 찜 목록에만 놔 두고 있던 게임을 급거 구입했습니다. 게임의 제목은 “OPUS MAGNUM”, 대략 “걸작품”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이며, 동시에 연금술에 있어서 지고의 완성품인 현자의 돌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제목이 나타내는 것처럼, 이 게임은 연금술에 관한 게임입니다.
2.
OPUS MAGNUM의 세계에서는 연금술이 과학의 원리를 대체하고 있습니다. 지수화풍으로 대표되는 사대원소설이 모든 물질의 생성 근본이 됩니다. 여기에 소금, 수은, 생명, 죽음과 같은 보조 원소들과, 납으로부터 6단계의 정련을 거쳐 금으로 우화하는 금속 원소를 결합하여 온갖 화합물들을 생성해낼 수 있습니다.
네, 이 세계에서는 납을 금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게임 스토리의 주인공은 고용주에게서 납을 금으로 바꿀 수 있냐는 질문을 받고 연금대학 졸업생을 바보취급하는 데도 정도가 있다며 “생선에게 헤엄칠 줄 아냐고 묻는 셈” 이라고 화를 냅니다.
화합물의 생성을 위해 게임에서는 “변성기관(Transmutation Engine)”이라 불리는 독특한 기구를 사용합니다. 연금술 화합물의 개별 원소를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정밀기계입니다. 게임의 목적은 이 정밀기계를 설계하는 것입니다. 원소를 붙잡아 옮길 수 있는 기계팔을 배치하고, 원소를 결합, 분리, 변조하는 각종 장비를 설치한 뒤, 기계팔의 회전과 이동 과정을 일일히 사이클(Cycle) 단위로 프로그래밍합니다. 주어진 재료들로부터 원하는 화합물을 생성하는 변성기관 자동화에 성공하면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게 됩니다.
이렇게 말로만 하면 쉬워 보이고 어떻게든 클리어하는 것은 썩 무리 없이 가능하지만, 스테이지를 “잘”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머리를 쥐어짜야 합니다.
변성기관 설계는 1) 구성 장비가 얼마나 저렴한가, 2) 얼마나 빠르게 화합물을 생성하는가, 3) 얼마나 좁은 공간을 사용하느냐, 등 세 가지 평가 척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만족시키는 설계는 보통 불가능하고, 어느 한 가지 척도에서 최고의 성능을 내기 위해 다른 요소를 희생하는 설계를 낳게 됩니다. 그 최고 성능을 향해 설계를 연구하고 배치하는 지적 유희를 즐기는 게 OPUS MAGNUM의 핵심 컨텐츠입니다.
직접 만든, 이론적 최고 속도를 획득한 설계 두 가지를 공유합니다. 네, 이 게임의 또다른 컨텐츠는, 설계 구동 장면을 GIF 애니메이션으로 녹화 출력해 주는 기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보고 있으면 예뻐요. 뿌듯하고요.
3.
에필로그 외전 격의 스토리에는 “계시의 안약”을 만든 어떤 괴짜 연금술사가 눈에 그 약을 넣고 나서 정신줄을 놓고 온갖 기괴한 기계가 지배하는 이상한 세계의 모습을 증언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쩌면 그 세계는 사원소가 아니라 13대 기본입자가 세상 모든 것을 구성하고, 자동화 기계 속에서는 원소가 소금에 붙어 오가는 대신 전자가 반도체를 달리는 세계가 아니었을까요.
현실 지구에서 연금술적 원리는 과학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완전히 부정당했습니다. 사원소설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자연을 논하던 시기의 해묵은 미신으로 남았습니다. 납을 금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런 이적을 허용하는 현자의 돌 따위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13가지 입자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진 원자와, 원자가 결합한 분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지금 우리의 과학 패러다임입니다.
하지만 때로 상상하곤 합니다. 만약 우리의 과학 기술이 조금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면? 어떤 이유에서든 모든 과학자들이 사원소설에서 떠나지 못하고, 더 정교하고 더 복잡한 사원소설의 발전형태를 개발해 우주 만물을 어떻게든 설명해낼 수 있었다면? 지동설에 의해 천동설이 배척되던 순간에도, 천동설 원리에 입각해 천체의 운동을 설명하는 것은 가능했습니다. 그 설명을 위해 요구되는 주전원의 개수가 비정상적으로 많았을 뿐이죠. 주전원적으로 누더기가 된 상태의 사원소설이 지금 현대 과학의 유효한 패러다임이라면, 우리는 어떤 모습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까요.
그리고 어쩌면, 우주의 다른 문명은 그런 길을 밟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과학적 성취를 이룬 문명이라면 당연히 원소주기율표를 밝혀냈으리라고 믿고, 보이저 호의 골든 레코드에도 수소 원자를 그려넣었는데요. 어떤 문명은 전혀 엉뚱한 패러다임 위에서 자연에 대한 모든 설명을 마치고, 원자의 존재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은 채 우주로 날아오르지 않았을까요. 해리 터틀도브의 “가지 않은 길”에 나온 것처럼 말이죠.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파트너 멤버 시아란
"오래 전 인디 플래시 게임으로 “연금공학전서(The Codex of Alchemical Engineering)”라는 게임이 있었고, OPUS MAGNUM과 거의 동일한 컨셉과 게임 디자인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플래시 게임에 착안해서 만들었구나 했는데, 웬걸, 같은 개발사가 만든 실질적 후속작이었습니다. 좋은 인디 게임 아이디어가 남의 손에 정교화되는 일이 종종 있는 업계라, 그렇지 않았던 점이 다행스러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