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와 새로운 만남을 가질 때마다 꼭 듣는 한마디가 있어요. 바로 이런 인사말이요.
“아, 여자분이신줄 알았어요!”
정확히 세어보진 않았지만 대략 열 분 중에 여덟 분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나머지 두 분도 입 밖으로 말하지 않으셨을 뿐 꽤 높은 확률로 비슷한 생각을 하셨겠죠. 아무튼 이런 오해를 받는 경험은 제게는 정말 익숙하고 오래된 일이에요.
아마 오해 사기 좋은 이름 때문이겠죠. ‘경희’라는 이름, 본명이거든요. 전산 시스템이 없던 초등학교 시절엔 종종 이름 때문에 여성부 대회에 명단이 들어가 있거나, 사설 수련회에서 여자 숙소를 배정받는 경우도 많았어요. 성별이 다른 동명이인과 전산 자료가 통째로 뒤바뀌어서 문제가 된 경우도 있었고.
하도 자주 겪는 일이다보니 이제는 조치를 취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고, 보통은 그냥 오해를 내버려두는 편이에요. 한참 뒤에 제가 여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자신의 편견에 대해 깨닫는 바가 있겠거니 싶기도 하고.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긴가민가한 경우엔 오히려 제 성별을 밝히는 일이 과잉 대응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그런데 최근엔 좀 곤란한 일이 생겼어요. 저를 여성작가로 추천하는 경우가 발견되고 있거든요. 그건 좀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죠. 여성작가 분들께서 힘겹게 쌓아올린 성취 사이에 제 이름이 끼어있는 상황은 별로 옳지 않은 일이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저의 성별을 정정하기 위한 글을 쓰게 되었고요.
아무튼 저는 여자가 아니에요. 제 주민번호 뒷자리는 1로 시작하고, 남중·남고를 졸업한 데다, 파주 인근의 철책선에서 군생활도 마쳤어요. 혹여 저를 여성작가로 알고 계셨던 분들께는 이 기회를 빌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실망하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ㅠㅠ
트위터에 ‘저 남자예요.’라고 한마디만 쓰면 될 걸 저는 왜 이렇게 빙빙 돌려 복잡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요? 그러게요. 저도 그게 참 고민이네요. 왜냐면… 저는 제가 남성이라는 인식이 조금 희박하거든요. 저는 제가 남성인지, 여성인지, 둘 다인지, 혹은 둘 모두 아닌지 잘 설명하지 못하겠어요.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저는 ‘젠더’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해요. 세상에 70억 명의 사람이 있다면 70억 개의 성별이 존재한다고 믿어요. 그렇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요.
그렇다고 딱히 제 몸에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에요. 제 성적 지향은 확실히 여성을 향하고 있고, 성별 불쾌감(Gender Dysphoria)을 느끼지도 않아요. 희미하게 번져있는 정체성의 스펙트럼 사이를 오가며 가끔 우울감을 곱씹을 뿐이죠. 적어도 지금은 그래요. 요즘엔 퀴어에 대한 이론들도 많이 대중화되었고, 저같은 정체성 인식을 가진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도 마련되어 있다고 들었어요. 15년 전에 그런 걸 알았다면 참 좋았을텐데.
이런 제가 사이버펑크를 사랑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 거예요. 마음대로 신체를 조작할 수 있는 포스트 휴먼의 시대엔 ‘젠더’라는 단어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할 테니까. 젠더라는 속성이 사라진 세계에선 끔찍한 젠더 혐오도 더는 생겨나지 않을 테고요. 이제 곧 현실이 될 새로운 미래 속에서, 저는 가변 체형 의체와 탈착식 성기의 꿈을 꾸며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겠죠.
성별과 상관 없이, 있는 그대로의 제 글을 읽어주셨으면 해요. 제가 저에게 주어진 권력과 폭력을 남용하지 않고, 저의 시선이 약자를 향하는 일을 멈추지만 않는다면요.
당신이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지 않기를 바라며. 오늘은 여기까지.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파트너 멤버 이경희
"혹시 제가 여자가 아니어서 실망하셨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