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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굴의 의지와 인간 승리 따위

분류
가디언멤버
작성자
OU
Written by 가디언 멤버 OU

불굴의 의지와 인간 승리 따위

요즘 세상의 기준에 따른다면 난 분명한 엘리트주의자이다. 개인의 무한한 자유보다는 사회 시스템을 통한 질서를 선호하고, 세상만사에는 엄연히 우선순위가 존재하며, 그 우선순위를 판별하는 것은 고도의 투자가 집중된 소수만이 할 수 있다고 믿으니까. 그런 면에서, 나는 이미 훌륭한 빌런의 잠재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번 8월 안전가옥의 주제 ‘살다보면 가끔,, 생각나는 빌런’을 보면서 지나치게 신나 하다가, 이내 쓰고 싶은 빌런이 너무 많아 당황하는 나를 돌아보면서 역시나 나는 상상의 세계에서도 빌런에 훨씬 더 동조하는구나 싶었다. 물론 여기서 미리 얘기하자면, 내가 이야기하는 빌런들은 ‘무식하고 탐욕스러운 기업가’나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사이코패스 살인마’ 캐릭터 등은 배제한다.
내 인생 최초의 빌런크러시(?)는 디즈니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마녀(혹은 악의 요정), 말레피센트였다. 정작 만화 자체는 디즈니에게 큰 손실을 안겨줬다지만, 이 애니는 말레피센트라는 우아하면서도 세련되고, 사실 생각해보면 무척이나 좀스러운 악당을 만들어냈다. 만화 전체에 걸쳐서 그녀가 저지른 범죄라고는 파티에 초대 못 받았다고 삐져서 공주에게 죽음의 저주를 걸고, 그 저주를 풀 왕자를 납치한 정도다. 오크 군단을 거느리고! 광범위 번개 폭격도 가하고! 성 전체를 가시나무로 뒤덮고! 용으로 변할 수도 있는, 지옥의 여주인(Mistress of hell) 씩이나 되는 양반이!
출처: imdb
그 이후에도 나는 디즈니에서는 <쿠스코? 쿠스코!>의 이즈마나 <헤라클레스>의 하데스, 지브리에서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유바바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황야의 마녀 등 꾸준하고도 지속적으로 주연들보다는 매력적인 악역들에 한표를 던졌다.
그리고 이러한 꾸준함의 이유를 찾다보니 결국 ‘불굴의 의지’와 ‘인간 승리’로 대변되는, 천편일률적인 영웅서사를 갖고 있는 주인공 캐릭터들과 내가 너무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기득권’과 ‘컨트롤’을 상징하는 악역들이 나와 더 가까웠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특히 미국과 일본이 심하긴 하지만, 한국도 결코 뒤지지 않는 주인공 아키타입 중 ‘무례하고,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상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심 넘치게 끝까지 악을 무찌르는 주인공’이 있다.
20세기까지 컨텐츠 업계에서 슈퍼맨, 기껏 어두워져 봤자 배트맨 정도로 ‘거의 완벽한’ 히어로를 지향했다면 21세기는 2001년 아동용 안티 히어로의 대표주자 ‘슈렉’과 함께 ‘거칠지만 내 사람에겐 따뜻하고, 어딘가 부족해 공감 가는’ 주인공의 시대로 넘어왔고, 감히 이 캐릭터들만큼 나의 성질을 긁는 존재들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 같은 시스템 빌런의 입장에서, 앞뒤 재지 않고 ‘규칙’의 무쓸모성을 역설하고 인간성과 자유를 빙자한 혼란을 야기하는 것을 조장하는 이러한 서사만큼 위험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꽤 도발적인 주장을 해보자면 풍요로운 20세기가 끝나고 경제위기 등에 점철되며 양극화는 고착화되고, 기후위기의 현실화 등 암담한 미래에 짓눌린 세대에게 더 이상 ‘될놈될’의 스토리가 팔리지 않으니, 일반 대중들이 공감할 수 있는 부족하고 결여된, 무책임한 인물들이 궁극적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대리만족을 선사하기 위한 스토리들이 흘러넘치는게 아닐까-특히 요즘 **에서 **한 이야기 등의 문장형 제목을 가진 라이트 노벨들이 대표주자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잘난 척하면서 각종 수상쩍고 난해한 과학을 들고나와 장황한 철학을 떠드는 엘리트들만큼 적절한 빌런도 없는거고.
이렇게 얘기하면 딱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져>에서 컴퓨터화된 아르님 졸라 박사가 얘기하는 것 같지만, 내가 궁극적으로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조금 다르다(고 믿는다). 오히려 이런 ‘선한 의도의, 하지만 룰을 따르지 않는 주인공이 어떻게든 세상을 구한다’는 서사는 인류가 힘을 합쳐서 효율적으로 우선순위를 가려 투자해야만 해결할 수 있는 거대한 문제들에 대처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한결 약화시킨다.
일반 개개인들이 힘을 합쳐서 규칙에 따라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나가는게 아니라, ‘영웅’의 등장을 기다리게 하고, 심지어 그 ‘영웅’은 반지성주의에 반과학주의로 무장한 사람이어야 한다니,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생각인가. 실제로 그 ‘영웅’ 서사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 지금 전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의 대통령으로 군림하고 있는걸 보면 이러한 서사가 현실에 갖는 파괴력을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 글을 마무리하는 빌런은 <피를 마시는 새>의 치천제 이라세오날, 그리고 원시제 그리미 마케로우다. 누구보다도 큰 선의(최대 597조에 달하는 선민 종족의 사망을 방지하기 위해)를 이루기 위해, 597조라는 방대한 숫자에 비해서는 티끌 같은 비용으로 해결책을 마련하였으나 그놈의 인간 찬가-아실의 분리주의, 정우의 꿈 등-로 비참하게 패하고 우주로 몰려난 그들.
남들 수천, 수만명 목숨보다 내 연인 혹은 친구 한명 목숨이 중하고, 아무리 합리적이고 데이터 기반으로 완벽하게 예측된 계획도 ‘인간성’을 거스른다며 자발적으로 혼돈과 파괴의 길로 나아가는 주인공들을 보면서 시스템적 통제를 지향한 빌런들이 얼마나 깝깝해 했을지 공감이 가 절로 한숨이 나온다.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가디언 멤버 OU
"아, 빌밍아웃하니까 너무 자유롭고 좋네요. 고구마 같은 부하들 때문에 고생하시는 말레피센트의 명대사(그리고 아마 말 안 듣는 선민 종족에게 치천제가 하고 싶었을 대사)로 마무리합니다. “Fools! Idiots! Imbeci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