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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훈하게 통역했던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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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부터 굉장히 기묘한 일을 겪었습니다. 새벽 3시에 강남 맥도날드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가게 안으로 제가 중학생 때 같이 놀았던 동네 누나가 들어오는 겁니다. 무려 7년 만에 다시 보는 얼굴이었습니다.
​기묘하죠?
이것 만으로도 충분히 기묘한데… 누나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저는 못본 척을 하기 위해 들고 있던 펜을 내려 놓았죠. 하지만 그게 부작용을 일으켰습니다. 누나의 시선은 테이블 위에 있는 '착! 붙는 러시아어 독학 첫걸음'으로 향했고,
“와, 개신기하다. 너 러시아어 공부해?”
결국 제게 말을 거셨습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 보니, 저는 누나와 함께 강남 밤거리를 걷고 있더군요. 얼떨결에 통역을 돕게 된 것이었습니다.
기묘하죠?
음. 덤덤한 척하지만, 솔직히 그 순간에는 무척 흥분이 됐습니다. 드디어… 이 년 동안 해왔던 러시아어 공부를 써먹을 데가 생겼어! 잘난 척할 수 있어! 하지만 저를 기다리고 있던 건… 다소 참혹한 광경이었습니다. 뚜레쥬르 계단 앞에서 외국인 두 분이 훌쩍이고 있던 겁니다. 심지어 그중 한 분의 얼굴은 피범벅이었습니다.
“왜 이런 거예요?”-나
“그걸 네가 지금 알아내야지.”-누나
이제 와서 “저 사실… 인사만 아는 뎁쇼.”라고 했다간 어떻게 될까요. 하지만 이미 누나에게 “러시아어 공부 한 지 이 년 됐어요.”라고 말해버린 뒤였습니다. “문제집 한 권을 이 년 째요.”라는 말은 생략했죠.
튈까.
하지만 그 순간 낯선 사람들이 제 주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누나와 같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누나가 그들에게 제 존재를 자랑했습니다. 통역가 구했어. 근데 얼마나 신기한 줄 아냐.
“얘 나랑 동네 친구야.“
누나가 저와의 만남을 설명하는 동안, 저는 구글 번역기를 사용해서 어떻게든 통역을 해냈습니다. 러시아 분들의 여행기를 들었습니다. 엊그제 한국에 도착한 그들은 클럽에 꼭 가보고 싶었답니다. 그게 여행 계획의 하이라이트였다네요. 하지만 입뺀을 당하고 말았답니다. 당황해서 항의하는데, 가드가 꺼지라면서 다짜고짜 그들을 밀쳤고, 그 바람에 omake 씨는 넘어졌고, 코피가 났고, 근처 계단에서 울고 있던 이들을,
“우리가 발견했지.”-누나
“근데 아까부터 궁금했는데요.”-나
“응.”
“‘우리’가 누구예요?”
강남 심야 보안관이었습니다. 위험에 처한 시민들을 돕기 위해 20대 초반 청년들이 뭉쳤다! 그들은 벌써 세 달째, 주말 밤마다 모여서 강남 밤거리를 순찰하는 중이랍니다. 저는 그 모임의 존재 이유를 물어보려다가... 관뒀습니다. 대신 러시아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했죠. 그러자 보안관들을 화가 났습니다. omake 씨를 밀친 가드에게 복수를 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그 희망사항을 통역하는 것은 또 제 몫이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분들이 ‘하라쇼’라고 답하는 순간​
강남 심야 보안관들의 업무가 시작됐습니다. 저도 계약직 멤버로서 업무에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A 클럽을 찾아 번화가를 헤맸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철이 없어 보일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저는 그 순간에 몹시 신이 났어요. 기묘한 짓을 하는 기분. 7년 전. 중학교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어요.
하지만 그런 하이 텐션은 A 클럽 앞에 도착하자마자 수그러들었죠. 목에 문신 있는 가드에게 다가가서 말 걸어야 하는 건 저였으니까요.
“저기…”
가드는 미동도 하지 않더군요.
“저 외국인분들한테 왜 그러신 거예요?”
“......”
“왜… 안 들여보내신 거예요?”
“시비 거냐?”
​ 저는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말로 “시비 거냐는 데요?”하고 물었습니다. 러시안분들이 대답을 했고, 저는 뻐꾸기 마냥 곧장 가드에게로 가서 그 말을 전했습니다.
“그냥 왜 안 들여보내주냐는 데요.”
“......”
“그것만 알려 달래요. 이유가 뭐냐고.”
가드는 갑자기 입을 다물어버렸습니다. 저의 임무는 ‘가드가 러시아인들을 무시한 이유’를 알아내기였는데, 그래서 그 이유를 토대로 보안관들과 함께 가드를 몰아세워서, 결국 그가 러시아인들에게 사과를 하게 만들기였는데, 가드가 계속해서 입을 다물고 있으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죠.
어쩌면 애초부터 이유란 건 존재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결국 저는 포기하고 자리로 돌아와야했습니다. 침묵을... 이기지 못한 겁니다. 임무를 실패했다는 생각이 눈물이 차올랐습니다. 보안관들이 제 어깨를 토닥여주셨습니다. 러시아인들도 시무룩한 표정으로 저를 격려했습니다. 그때, 제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쳤습니다. 그
기묘한
작전은 곧 모두의 동의를 얻고 실천으로 옮겨졌고, 우리는 다 같이 클럽 앞으로 이동했습니다. 가드는 살짝 당황한 모양새였습니다. 저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나쁜 놈.”
“......”
“비열한 자식.”
​ 꿋꿋하게 할 일을 했습니다. omake 씨가 다음 번 ‘하고 싶은 말’을 읊었고, 제가 통역을 했습니다.
“강자가 약자에게 약해야지. 어디서 부리냐 텃세”
“......”
“왜 말 안 허냐. 아가리 얼었냐?”
“잠깐만. 러시아에도 그런 말이 있어?”-누나
“직역으로 할까요?”-나
그렇게 가드가 내내 침묵으로 우리에게 맞서는 동안, omake 씨는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털어놓았습니다. sanke 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속이 후련해진 러시아인들은 우리를 향해 연신 합장 자세를 취하며 감사함을 표했습니다. 누나가 웃으면서 ‘이게 바로 한국의 한풀이 문화’라고 설명했습니다. 물론 그건 어떻게 통역해야 할 지 모르겠어서 그냥 ‘스파시바’라고만 통역했습니다. 그렇게 악수를 나눈 뒤, 러시아인들은 남은 여행을 위해서 떠났고,
“넌 이제 어디로 가?”-누나
설날을 맞아 시골에 내려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보안관들이 터미널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급구 거절했으나, 어차피 그들의 임무가 ‘시민들 안전 귀가’라는 소리에 납득해버렸습니다.
덕분에 안전하게 고속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 어느새 새벽 다섯 시였죠. 첫 차까지는 한 시간이 남아 있었습니다. 설마 그 한 시간까지 같이 기다려주려는 건 아니겠지, 라고 걱정했던 걸 놀리기라도 하듯, 누나는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잘 지내! 오늘 고마웠어!”
“저…”
전화번호를 물어볼 새도 없이 말이에요. 그런 순간이 있잖아요. 아, 지금이 이 사람과 내가 만나는 마지막 순간이 되겠다는 예감이 드는 순간. 그게 순식간에 지나가버리니 저는 벙쪄서 고속터미널 호남선 벤치에 멍하니 앉아있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저의 스물 세 번째 설 날
새벽에 일어난 일들을 복기했죠. 원래는 그 시간에 러시아어 공부를 하고, 책을 읽을 계획이었습니다. 그렇게 내 스스로에게 ‘열심히 산다’는 증거를 납득시키려 했죠. 하지만
계획이 망쳐졌음에도 제 마음 속에는 성취감이 가득했습니다. 사실 제 가방 속의 책들은… 진짜 계획이 아닌 뭔가 해야 한다는 내 압박감이 만들어낸 무게일 뿐이죠. 설에는 그냥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나러 가야지. 뭔 버스에서 러시아어 공부하고, 소설 쓰고, 그러려고 생쇼였냐. 그래서 저는 고속버스에서
쉬었습니다. 노래만 들었습니다. 뭐, 어차피 원래 그럴 거였긴 한데(이제까지의 저를 돌아 보면 매우 높은 확률로 말이에요.), 굳이 다른 점이 있다면 마음이 편했습니다. 그 상태로 옛날 생각에 빠져들었습니다. 나는 열 여섯, 누나는 열 여덟이던 시절. 인천 서구 가정동. 코끼리 놀이터. 어쩌면 서로를 ‘잘 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게 친구들의 의무가 아닐까. 대답 없는 세상에 맞서! 그래서 가는 길이 달라진
옛 친구들 모두에게 이 지면을 빌어 축복하고 싶다. 두서 없지만, 그들이 있기에 내가 있고 내가 있기에 그들이 있네, 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기묘하죠?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파트너 멤버 류연웅
“하바롭스크는 제 인생 최고의 여행지였어요. 거기서 펑펑 내리는 눈을 맞았던 기억 하나로 쓸 일 없는 러시아어 공부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쓸 일이 생겼던 1월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