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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례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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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마지막 날이 되면 치르는 의식 아닌 의식이 있어요.
이렇게 말하니까 너무 거창한 것 같은데... 엄청나게 오래된 전통을 자랑하는 그런 건 아니고요. 2020년이 6번째였네요.
12월 31일 밤 10시 58분.
경건한 마음으로 TV앞에 앉습니다. 영화를 볼 거예요.
와인도 한 잔 있으면 좋구요. 딱 한 잔만요.
다른건 몰라도, 시간은 꼭 10시 58분이어야해요.
오프닝 크레딧이 끝나고 영화가 시작됩니다.
첫 장면은 주인공이 가계부를 작성하는 장면이에요. 통장 잔고는 7883.37달러. 여기서 한숨을 한 번 푹 쉬고요.
다음으로 하는 일은 온라인 연애 사이트에서 자신이 짝사랑하는 회사 동료의 이름을 검색해보는 거예요. (이미 몇 번은 본 것일 테지만) 프로필도 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보고, 웃기도 하고요.
그러는 사이에 2분이 지났네요. 이제 새해가 한 시간 남았습니다.
출근길. 주인공은 오류가 나 말썽을 일으켰던 온라인 연애 사이트 관리자와 통화를 합니다. 직원 이름이 토드네요. 문제점을 찾던 두 사람은 곧 이런 대화를 하기에 이릅니다.
T: 프로필에 빈칸이 많네요. ‘가본 곳’이나 ‘해본 것’ 항목이 모두 비어 있어요.
W: 거기 적을 만큼 대단한 곳에 가본 적이 없어서요.
우리의 주인공은 정말 평범하고 심심한 남자네요. 집, 회사, 집, 회사...밖에 모르나 봐요.
다시 대화를 이어가려는데, 주인공의 귓가에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딱히 대단한 곳에 가본 적도, 뭔가를 해본 적도 없다던 주인공이 개 짖는 소리를 따라 뛰어가더니, 슝 하고 날아서 어느 건물 창문을 깨고 들어갑니다. 가스 냄새를 맡고 폭발을 감지했거든요. 그리고 건물에서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개 한 마리를 구해서 나오죠.
어머, 그런데 그 개가 짝사랑 상대인 회사 동료, 셰릴의 개였네요.
감격한 셰릴이 “어머! 너무 멋진 분이네요!” 감탄하는 순간. 주인공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합니다. 음, 이 부분은 한국어 자막으로는 그 멋짐이 전달되지 않으니까, 원문을 그대로 옮겨볼게요.
“I just live by the ABCs: Adventurous, Brave, Creative.”
어머, 이 허세 뭐야아? 아까는 딱히 가본 데도 없고 해본 것도 없다더니?
네 맞아요. 방금 일어난 일은 주인공의 상상입니다. 영화의 첫 장면으로부터 대략 5분이 흘렀고요, 이제 영화 제목이 나옵니다.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
2013년 12월 31일에 개봉한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입니다.
너무 유명한 영화라...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고요. 꼭 밤 10시 58분에 영화를 시작하는 이유를 알려드릴게요.
대략 새해가 15분쯤 남은 시점이 되면,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사랑하는 장면 중 하나가 나와요.
주인공은 지금 그린란드의 한 술집에 앉아 있습니다. 가야 할 목적지는 그린란드 바다 한가운데에요.
운 좋게도, 주인공 맞은편에는 거기까지 태워줄 수 있는 헬리콥터 조종사가 앉아 있네요. 하지만 주인공은 그 남자와 함께 헬리콥터에 오르는 걸 포기합니다. 날씨가 좋지 않거든요. 곧 태풍이 올 것 같아요.
그리고... 조종사는 아주아주 많이 취한 상태고요.
그린란드까지 왔지만, 어쩔 수 없네요.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겠어요. 뭐... 괜찮아요. 상상은 상상일 뿐이잖아요. 늘 신나고 기발한 상상을 하는 것과는 다르게, 우리의 주인공은 무기력하고 소심한 사람이니까요. 그럴 줄 알았어요. 헬기는 무슨 헬기에요?
그런 주인공 앞에 셰릴이 나타납니다. 세상에! 여기는 그린란드인데요! 그리고 셰릴이 노래하기 시작하죠.
Ground Control to Major Tom. Take your protein pills and put your helmet on.
세상에... Space Oddity라니!
전 사실 극장에서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이 장면에서 좀 울었어요. 제가 데이빗 보위의 노래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상상해보세요. 밤늦게 영화관을 거의 전세 낸 듯한 모양새로 영화를 보고 있는데, 사랑하는 가수의 노래가 배경으로 깔리고, 내내 소극적으로 망설이던 주인공이 여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선택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니! 헬기에 뛰어서 올라 탄다니!
제가 눈물이 헤퍼서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시간이 조금 흐르고, 영화의 몇 장면이 지나가면 새해 카운트다운을 시작합니다.
10, 9, 8, 7....... 2, 1. 해피 뉴 이어!
그리고 거의 곧바로, 그 장면이 시작돼요. 영화를 시작하는 시간이 밤 10시 58분이어야 하는 이유!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진 아이슬란드의 도로 위를, 주인공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달립니다. 어릴 때처럼요. 영화를 시작한 후 거의 처음으로, 환한 얼굴로 웃기도 하고요.
영화가 시작할 때 주인공이 상상 속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제 월터는 정말로 모험심이 가득하고, 용감하고, 창의적인 사람이 되었네요.
그래서 저는 여기서 또 좀.... 울어요. (눈물이 헤픈 게 아니라니까요?)
싱겁지만, 이게 제가 최근 몇 년간 매년 마지막 날 밤을 장식하고 새해를 맞는 방식이에요.
가장 좋아하는 영화의 좋아하는 장면들을 적절한 타이밍에 맞춰 감상하면서 한 해를 마치고, 동시에 시작하는 거요. 매년 똑같이, 조금 심심하니 밋밋한 것도 같은 느낌으로요.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고 해서, 딱히 엄청나게 재밌는 일이 생기진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어요. 사는 건 영화 같은 게 아니니까요.
그치만 판타스틱하고 쇼킹한 뭔가가 없어도 소소하게 여러 번 웃는 일은 있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거든요. 실제로 이편을 더 선호하고요.
어쩌면, 제가 안온함을 추구하는 성격이라 이 영화를 더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12월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이제 2020년은 잘 보내주고. 우리는 2021년에 만나요.
피식피식 여러 번 웃을 수 있는, 다정한 사람들이 나오는 다정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해피 뉴 이어! 내년에도 잘 부탁해요!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파트너 멤버 이재인
1. “I just live by the ABCs: Adventurous, Brave, Creative.”
이 영화에서 제일 좋아하는 대사에요. 저의 안전가옥 명함 속 한 줄이고요.
2. 저는 이 영화 속 ‘Space Oddity’ 장면처럼, <마션>에서 보위의 ‘Starman’이 나오는 장면에서도 울었다고 합니다. (눈물이 헤픈 게 맞는 것 같다고 합니다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