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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줄 알았으면 공부 좀 더 할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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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모교에서 인터뷰한 얘기에 살을 덧붙여 보자.
우리 학교는 복수전공에 학점 및 인원 제한이 없고 그냥 신청만 하면 되어가지고 절대다수가 복수전공을 했다. 근데 나는 심리학 단일 전공으로 졸업했다. 그 시기에 ADHD가 대폭발해서 이 전공 저 교양 즉흥적으로 깔짝대기만 했던 것이 문제였다. 와! 컴퓨터공학도 다른 언어도 생물학도 경제학도 정치외교학도 사회학도 재밌어 보이는데 뭘 들어야 하지! 결국 제대로 이룬 건 하나도 없었다. 제일 많이 들었던 타 전공이 생물학이었다. 20학점 좀 넘었던 거 같기도 하고. 잘 기억이 안 난다.
졸업했을 때는 그냥 망했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물론 내가 요새도 맨날 하는 생각이긴 한데, 그때는 그 강도가 상당히 심했다. 경쟁에서 뒤쳐졌다는 생각. 다른 동기들은 다 학위 여러 개 달고 가는데 나 혼자 팽팽 놀기만 했다는 생각. ADHD 각성제는 뭐 도움이 되는 게 없다는 생각.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놀랍게도 그때 깔짝거렸던게 소설을 쓰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생물학을 공부한 게 SF를 쓰는 데 특히 주요하게 도움이 되었다. 분자생물학적 지식을 뇌에 쑤셔넣으면서, 그동안 자연과학과 멀찍이 떨어져 있던 내게 나는 최소한의 과학적 엄밀함을 부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실험 실습에서는 과학적 방법론을 직접 적용해 보고 '이게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그냥 레버나 좀 당기는 것 같지만 알고 보니까 테크닉이 상당히 중요하다. 손떨리면 과학은 못한다'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뭐 물론 제일 중요한건 테크노바블. 그러니까 과학기술처럼 보이는 썸띵 어썸한 단어를 대충 주워섬길 수 있게 되어서 분위기를 살릴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 있겠지만.
그것 뿐인가 싶다. 신화나 라틴어 교양은 많이 찾아들었는데, 나올 때는 세상 무의미한 학점이었다고 한탄하던게(특히 라틴어 찾아들었던 건 이탈리아 여행 갔다온 친구한테 맨스플레인할 때 빼고는 완전 쓸모가 없는 것 처럼만 보였다), 훌륭한 레퍼런스가 되어주었다. 신화와 과거의 언어는 언제 어디서나 가져다 쓸 수 있으니까.
과학사 수업도 내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그냥 다른 역사 과목은 이름이 예쁘지 않은데 과학사는 이름이 상당히 예쁘고 고등학생 때까진 들어본 적이 없어서 듣게 되었는데(나의 의사결정은 참으로 이런 식이다), 교양수업이 내게 그렇게 강렬한 영향을 미칠 줄은 몰랐다. 그때 과학과 사회가 서로 상호작용하는 것, 과학기술이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걸 느낀 게 내가 SF를 쓰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열심히 공부했는데 학점은 좀 나빴지만.
과학사를 제외하면 당시 들었던 수업 내용 중 기억이 나는 건 사실상 무에 가깝다. 신경생물학의 G Protein Signaling의 기작은 처음부터 끝까지 깨끗이 망각했다. G Protein의 신호 전달이 뉴런 간의 소통에 매우 중요하다 정도의 막연한 이미지만 머릿속에 둥둥 떠다닌다. 그렇다면 내가 많이 잃은 것일까?
그건 아닌 듯 하다. 그 키워드들이 머릿속에 남아 있으니까. 필요하다면 검색해서 찾아 읽으며 망각한 부분을 메꾸면 되니까. 무엇을 검색해야 할지 어렴풋이 아는 것만으로도 지금까지 얼레벌레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학교에서 여러 분야를 듬성듬성 많이 맛봤는데, 어쩌면 그게 나 같이 대충 사는 인간이 학부에서 얻어갈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성과 아니었나 싶다. 키워드랑 내가 뭘 모르는지 아주 희미하게나마 안다는 것.
하여튼 학부생이 가까이 있다면 다른 분야 수업도 이것저것 들어보고 하는게 정말 과실이 남는 경험인 걸 말하고 싶었다. 물론 나처럼 ADHD 폭발해서 막 듣고 이러는건 좀 그렇지만. 잘 전달됐으려나. 나는 만족한다… 아니. 아니다, 아직도 부족하다.
사실은 밑천을 좀더 늘리고 싶다. 내가 전혀 모르는 분야에 발가락 끝이라도 담가볼 걸 하고 후회한다. 가능하면 경제학이나 법학 같은 분야를 생각하고 있다.
흠, 역시 방통대를 끊어야 하려나.
이제 월간 안전가옥도 끝이니 방통대 수업을 들을 시간도 더 날테니까.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파트너 멤버 심너울
“안녕, 월간 안전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