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되고 싶다는 인생 최대의 꿈에 도달한 이후로, 이제부터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할지 생각하는 일이 올해의 가장 큰 고민이었던 것 같아요. 1년을 꼬박 고민해보아도 여전히 정답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한가지는 분명해요. 지금 내가 서있는 자리를 지키고 싶다는 것. 아둥바둥 지금의 위치에 매달려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는 것.
위기감에 내몰려 허겁지겁 쓰고 또 쓰는 한해였어요. 겨울잠을 앞둔 다람쥐처럼 바삐 손가락을 움직인 덕분에 도토리같은 결과물들이 잔뜩 쌓였고, 이제 하나씩 성과를 확인받아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어요. 솔직히 조금 겁이 나요. 과연 제가 더 나은 사람이 되었는지 저로서는 알 도리가 없으니까.
올해 저는 <그날, 그곳에서>라는 제목의 장편을 하나 썼어요. 1월에 트리트먼트 작업을 시작해 12월 31일 밤인 지금까지도 마지막 교정고를 검토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꼬박 1년을 이 작업에 매달린 셈이군요. 데뷔작인 <테세우스의 배>는 제가 제일 자신있고,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재료들을 활용해 쓰고싶은 대로 질주한 작품이었던 반면, <그날, 그곳에서>는 모든 면에서 정 반대의 목표를 갖고 썼어요. 제가 잘 하지 못하는, 평소라면 쓰지 않을 유형의 이야기들을 그러모아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것. 그 결과물이 세상에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기대와 걱정이 반반이에요.
올해는 단편도 꽤 많이 썼습니다. 마마신 설화를 모티브로 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홍진국대별상전>, ‘한나와 수진 시리즈’ 두 번째 작품 <신체강탈자의 침과 입>, 선녀와 나무꾼 설화를 모티브로 작업한 <파종선단>, 책을 주제로 한 인공지능들의 이야기 <바벨의 도서관>, 아직 제목을 공개할 수 없는 중편 하나와 단편 하나, 토정 이지함 연작을 이어가는 <능소화>까지. 아마 곧 순차적으로 공개할 수 있을 거예요.
참, 논픽션도 한권 썼습니다. <SF,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라는 제목의 에세이예요. 가벼운 마음으로 SF덕질의 추억을 정리해본 책인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셔서 정말 감사한 마음 뿐입니다. 특히 부록으로 포함된 백과사전 파트가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 내년에도 후속 기획으로 찾아뵙게 될 것 같아요.
이런저런 사정으로 바쁘고 힘들지만, 내년을 위한 재료들을 조금씩 준비하고 있어요. <테세우스의 배> 세계관을 활용한 후속 시리즈도 차근차근 기획중이고, 새로운 신작 장편도 내년 중에 완성하는 걸 목표로 구상을 다듬는 중이에요. 사이사이 단편들도 쓰게 될테고요. 어쩌면 소설 외에 다른 활동으로도 찾아뵙게 될지도 모르고. 써놓고보니 정말 숨막히게 바쁠 것 같군요. 스불재... 스불재...
여하튼 이렇게 2020년이 끝났습니다. 다사다난이라는 말이 이토록 어울리는 한해가 또 있을까요? 올 한해 모두 정말 고생하셨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요. 그리고 모든 불행이 우리를 빗겨가기를. 내년에도 우리 함께 버텨보아요. 여러분께 장수와 번영을!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파트너 멤버 이경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