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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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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대한민국의 군사전용 통신위성 '아나시스 2호'가 얼마 전 스페이스X의 팰컨9 로켓에 실려 성공적으로 발사되었지요. 하늘에서 또 하나의 고무적인 성과가 이뤄지는 동안 땅에서는 미증유의 재난 시국을 극복하기 위한 코로나19 백신 개발이 한창이고요. 과거에 우주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꿈 속의 세계였고 질병은 신이 내린 재난이었지만, 우주공학과 의약학의 발전은 한때 신들의 세계였던 곳으로 인류의 발걸음을 차근차근 이끌고 있습니다. 우리의 지평이 점점 더 멀고도 깊은 영역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데에는 짜릿한 경이감이 있어요. 다음 재난, 또 그 다음 재난 앞에서도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 전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게 만들기도 하고 말입니다. 아, 하지만 아쉽게도 2020년 7월의 인류 진보 대상은 우주공학이나 의약학 분야가 아닌 다른 곳에 주어져야겠네요. 로켓이나 백신보다 훨씬 더 경이로운 걸 발견했거든요! 여러분, 혹시 새로 나온 에그토스트맛 감자칩 드셔 보셨나요?
아니, 농담이 아닙니다. 에그토스트맛 감자칩은 현대 과학의 혁명이자 인류 진보의 최전선이에요. 우리의 머나먼 조상들이 처음으로 불을 피워 식재료를 익혀 먹은 이래 꾸준히 발전해 온 식품공학이 마침내 도달하고 만 경이의 특이점입니다. 저도 한국 식문화의 기묘한 첨단들에 대해 편의점 앤솔로지 수록작에서 잠깐 다룬 적이 있었지만, 에그토스트맛 감자칩은 그런 상상의 영역조차 넘어섰다고요. 어떻게 감자칩에서 계란후라이 가장자리 바싹 익은 부분 맛이 날 수가 있죠? '에그토스트맛 시즈닝'은 도대체 무엇이기에 평범한 감자칩을 감자칩 형태의 에그토스트로 바꿔놓을 수가 있는 걸까요? 제가 몇 문장 앞에서 괜히 '특이점'이라는 표현을 쓴 게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감자칩에 가루를 좀 뿌려서 완벽한 에그토스트의 맛을 재현할 수 있다면, 다른 모든 음식들에 대해서도 같은 과정이 적용될 수 있을지 모르고, 그렇다면 결국 모든 음식은 감자칩 시즈닝으로 환원될 수 있을 테니까요! (네, 과자가 생각보다 맛있어서 과장 좀 했습니다.)
음, 진정하고 다시 생각해 보니까 '모든 음식이 감자칩 시즈닝으로 환원된 미래'는 유토피아보다는 디스토피아에 더 가깝게 들리기도 하네요. 디스토피아를 다룬 작품에서 작중 세상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단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쓰이는 묘사를 하나 꼽자면 뭐니뭐니해도 '맛없고 단조롭고 인공적인 밥' 아니겠어요? 영화 <설국열차>에서 가장 강렬한 장면은 바퀴벌레를 이용해 양갱 비슷한 단백질 블럭을 만드는 장면이죠. <소일렌트 그린>처럼 아예 우리가 아는 식문화가 완전히 붕괴해 버린 미래상을 주요 소재로 삼는 작품도 있고요. 식사란 모든 생명체의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라 할 수 있고, 그렇기에 매일 먹는 식사의 질이 떨어진다는 것은 곧 삶이 우울하고 비참해진다는 뜻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바꿔 말하면 밥만 맛있게 잘 나와도 어지간하면 세상이 디스토피아까지 떨어지진 않는다는 뜻도 될 테고요. '이밥에 고기국'이 지상락원의 표어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예요. 이밥맛 감자칩과 고기국맛 음료가 인민들에게 대신 지급된다고 하면 확실히 디스토피아적으로 들리지 않나요?
디스토피아에 대한 상상이 그 어느 때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오고 마는 시대입니다.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모두 우주로 도망가든가, 끊임없는 질병의 위협과 싸우든가, 아니면 합성 계란과 합성딸기로 된 신작 합성 케이크를 먹든가 하고 있을 것만 같지요. 운이 더 나쁘다면 그 세 가지마저 전부 실패한 다음 그냥 망해버린 지구에서 시름시름 앓으며 보급형 단백질 블럭이나 씹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만일 지금이 "축제처럼 시끌벅적하던 시대가 천천히 저물어가기 시작하던 시절"이라면, "훗날 '저녁뜸의 시대'라 불리게 될 고즈넉한 시간 속"을 지금 우리가 별로 고즈넉하지 못한 꼴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면, 최소한 인류 최후의 만찬이 마지막에 걸맞게 근사했으면 좋겠습니다. 식품공학의 발전이 우리에게 빵맛 감자칩과 포도주맛 음료라도 남겨줄 수 있다면, 그럼 인류 문명이 그래도 최소한의 성과는 거둔 셈이라고 회고할 수 있지 않을까요.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파트너 멤버 이산화
“SF 작가. 제로콜라가 그냥 콜라보다 식품공학적으로 더 진보되었다고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