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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자르고 마스크를 쓰고 방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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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많은 일이 있었다면 있었고 없었다면 없었던 오묘한 한 해였던 것 같습니다. 일기를 쓰지 않았고 남겨진 사진도 몇 장 없어서 올해의 단어들을 가볍게 정리해보려고 해요.
숏컷.
허리에 다다르던 머리가 무겁다고 느껴진 건 봄쯤이었습니다. 머리를 기르려고 길렀던 것은 아닌데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보니 왕창 자라버렸어요. 이제 그만 머리를 자르자고 마음을 먹고 거의 매일매일 생각이 바뀌었어요. 결국 여름이 되어서야 생애 첫 숏컷을 도전했어요. 팔뚝을 다 덮던 머리가 귀 옆에서 싹둑 잘려 나갔습니다.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자른 적은 많았지만 이번은 뭔가 특별한 기분이 들었어요. 뭐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던 때인지라 어딘가 속이 좀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목이 휑한 채로 하반기를 잘 보냈습니다. 십분 만에 머리가 마르는 기적을 누렸어요. 머리 손질은 아직까지도 손에 익지 않았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외출할 일이 많지 않아 괜찮았습니다. 아무리 잘 말리고 자도 다음 날 아침 머리에 커다랗게 지어지는 까치집이 좀 고민이긴 하지만 그냥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까치는... 길조니까요.
마스크.
살면서 이렇게 많은 마스크를 사게 되는 날이 올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이제는 마스크 없이 나가는 게 더 어색할 것 같아요. 일 년 내내 마스크를 쓰면서 느껴지는 변화가 하나 있는데요. 어느 순간부터 제 표정이 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잠깐 커피를 사러 나가거나 사람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하거나 길거리를 지날 때에도 내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점점 남을 의식하지 않게 된다고 할까요. 답답하기만 했던 마스크가 적응되면서 이상하게도 그 뒤에 숨어 있는 게 뭔가 편안한 느낌도 들었어요. 마스크를 쓰기 이 전에도 얼굴에 마스크를 한 겹 쓰고 살았을지도 모르겠네요. 남의 시선을 많이 신경 쓰고 살았다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방.
올해 초 다니기 시작한 대학로 작업실을 삼 개월 만에 포기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페에서 작업도 할 수 없게 되었죠. 그렇게 저는 방에 있었습니다. 집에서 작업을 하기 시작했고 생각보다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엄마의 사랑으로 삼시 세끼를 거하게 얻어먹으며 몸은 살이 쪄갔지만 효율 없이 시간을 쓰고 있다는 불안함은 의자와 책상 사이에 있는 가구처럼 저를 하루 종일 앉아있게 만들었습니다. 일과 생활의 경계가 사라지고 그렇게 좋기만 하던 제 방도 편하지가 않아졌어요. '집에 있어도 집에 가고 싶을 거야.' 자이언티의 노래 가사에 극공하는 바입니다.
2020년. 제 생활과 생각은 많이 단순해졌습니다. 아마도 재난 영화나 아포칼립스 소설처럼 극한의 상황에서는 중요한 것들과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것들의 선이 명확해지는 것 같습니다.
올해를 굳이 한 줄로 정리해보면 '머리를 자르고 마스크를 쓰고 방에 있었다.' 일까요. 이상하네요. 역시 이상한 한 해였습니다.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파트너 멤버 김효인
"그래도 좋은 일, 감사한 일이 많은 한 해였습니다. 늦었지만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