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earch
👾

아직 준비되지 않았어

분류
파트너멤버
작성자
이산화
집에 틀어박혀 있기를 권장하는 시국입니다. 저는 대체로 집에 틀어박혀서 살았기 때문에 삶에 아주 큰 변화는 없습니다만, 그래도 특히 심혈을 기울여서 틀어박히는 것은 또 확실히 느낌이 다르네요. 이왕 밖에 나가기도 곤란해진 거 책상 옆에 산더미처럼 쌓인 책도 읽고, 미뤄 뒀던 이런저런 프로젝트도 다시 시작하고, 여유 있게 작업물도 좀 만들어 두고……할 수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만, 현실은 그냥 끝없는 마감과의 싸움이로군요.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에 호기롭게 붙잡아 놓은 일거리들이 거대한 업보가 되어서 저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대략 한 달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쓸 수가 없어서 온갖 부정적인 생각만 하면서 괴로워해야 했고요. 하지만 구할 수 있는 가장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몇 통 퍼먹고 나니까 조금씩이나마 머리가 돌기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은 '늦더라도 안 하는 것보단 낫다' 정신으로 조금씩조금씩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틀 전에도 작은 일을 하나 끝냈어요. 기세를 타서 이렇게 쭉쭉 처리하면 되겠죠! 예에!
음, 그러면 참 좋을 텐데, 아쉽게도 '작업 하나를 끝낸 뒤에 그 기세를 타서 다음 일에 손을 댄다'는 전략이 성공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옛날 문인들이 우겨댄 방법대로 술기운에 뭘 해보려고 한다든가(맨정신으로 안 되는 일은 술을 마셔도 안 된단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뭔가 새로운 일을 시도해서 영감을 얻으려고 한다든가(기분 전환엔 도움이 되었으나 당장 닥친 마감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같은 전략과 똑같이 실패하더라고요. 실패의 이유는 명확합니다. 일을 하나 끝내면 그 다음에는 탈진 기간이 찾아오고, 이 기간에는 사람이 축 늘어지는 바람에 도무지 무슨 작업이 안 되는 것이죠. 큰 작업을 마친 뒤일수록 탈진 기간도 길어지고요. 글쓰기에 적용되는 일종의 재사용 대기시간이라고나 할까요.
'재사용 대기시간'은 흔하고도 오래 된 개념이죠. 강력한 기술을 연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편리한 밸런스 조절 방법이고요. 재사용 대기 시간이 짧은 일반 기술 3개 가량 + 재사용 대기 시간이 긴 강력한 기술 1개라는 인기 조합은 제가 아는 한 <워크래프트 3>의 영웅 시스템이 시초이고, <워크래프트 3> 오리지널 시절의 인기 유즈맵이었던 DotA와 그 아류작들을 거쳐서 지금처럼 여기저기에 다 쓰이게 된 것으로 기억합니다. 반면에 '재사용 대기시간 감소' 옵션의 역사는 훨씬 짧아요. <워크래프트 3>의 맵 에디터에는 재사용 대기시간을 직접 건드리는 기능이 없었습니다. 스킬 레벨을 올릴 때마다 재사용 대기시간이 줄어들게 만들 수는 있었지만요. 유즈맵의 한계를 넘은 스킬 구현으로 이름이 높았던 DotA Allstars에서도 재사용 대기시간이 일정 비율로 감소하는 아이템이나 능력은 없었고, 다만 자신의 모든 재사용 감소 시간을 리셋하는 아이템(재생의 구슬)과 스킬(땜장이의 궁극기 '재무장')만이 존재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재사용 대기시간을 자유롭게 줄일 수 있게 된 것은 이 부류의 게임들이 워크래프트 엔진을 벗어난 뒤의 일이지요. 물론 밸런스상의 문제 때문에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든 <도타 2>에서든 재사용 대기시간을 줄이는 건 한계가 있거나, 아니면 대단히 큰 비용이 드는 일이거나 합니다. 네, 그리고 현실에서도 그렇더라고요. 마음은 급한데 이 놈의 탈진 기간은 도무지 줄어들지를 않아요.
이번 탈진 기간에도 대체로는 바닥에 늘어져 있었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꿈 속에서 이불을 새로 깔고 누워서 다른 꿈을 꾸다가 다시 일어나서 이불을 정리하고……하는 혼란스러운 메타-꿈꾸기까지 했습니다만, 그래도 다른 유의미한 일을 하려고 노력은 해봤어요. 구할 수 있는 식재료를 이용해서 가장 아즈텍스러운 한 끼를 만들어 보았고(고춧가루와 코코아는 꽤 괜찮은 조합임을 알려드립니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시대답게 미궁 게임에서 사이버 데이트도 했고(문제가 조잡하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지금 이 글도 쓰고 있군요. 쓰는 속도를 보아하니 손이 어느 정도는 풀린 것 같은데, 아마 내일 중에는 기나긴 재사용 대기 시간이 다 끝나 있지 않을까 싶네요. 만일 아니라면, 음, 다음번에 들어올 원고료로는 팔색구를 하나 맞추든가 해야겠습니다.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파트너 멤버 이산화
“SF 작가. 팔색구는 재사용 대기시간 감소 25%가 붙은 <도타 2>의 아이템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