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earch
🌬️

봄이 오고 가는 속도, <초속 5센티미터>

분류
운영멤버
스토리PD
작성자
벚꽃도 모자라 이제 샴푸향으로까지 연금을 받게 됐다는 그 분의 노래들처럼. 산에 들에 피는 꽃만 보면, 코 끝을 스치는 봄바람이 불면 생각나는 바로 그 장면, 그 이야기. 2021년 3월 월간 안전가옥의 주제는 '봄에 생각나는 그 콘텐츠' 입니다.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운영멤버 테오
어김없이 봄이 왔고, 어김없이 벚꽃이 피어났습니다. 다만 올해 벚꽃은 1922년 벚꽃 개화시기를 관측한 이래 가장 빨리 개화했고, 비 때문에 가장 빨리 지기도 했습니다. 작년이 역대로 가장 빠른 3월 27일에 피었는데, 올해는 3월 23일에 개화했다니 기후 변화가 확실히 체감되는 수치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봄과 벚꽃은 완벽한 짝꿍처럼 새로운 시기를 맞이하는 많은 사람에게 그만큼의 많은 감정을 선사하곤 합니다. 그렇기에 봄과 관련된 콘텐츠에는 벚꽃과 더불어 사랑이라는 키워드도 빠질 수가 없지요.
“어느 정도의 속도로 살아가야,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이 카피는 이제는 일본 애니메이션계에서 점점 거장이 되가고 있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아직 대중적으로 유명해지기 전인 2007년에 발표한 <초속 5센티미터>라는 애니메이션의 메인 카피이지요.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별의 목소리> 등으로 새로운 감성을 선보인 마코토 감독은 당시만 하더라도 이메일주소를 사람들에게 공개했었고, 어느 날 어떤 팬이 그에게 ‘벚꽃 잎이 떨어지는 속도가 초속 5cm라는 걸 알고 계신가요?’ 라는 글귀를 보냈고, 마코토 감독은 초속 이란 단위에 꽂혀 그 팬에게 다음 작품 제목으로 이걸 써도 되냐고 허락을 구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초속 5센티미터>는 ‘벚꽃 이야기’, ‘우주 비행사’, ‘초속 5센티미터’ 이렇게 총 3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연작 애니메이션입니다. 이전 그의 작품의 이 작품 이후의 그의 유명작들인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와는 다르게 아주 현실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아주 현실적인 인물들의 첫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요. <너의 이름은>을 보고 뒤늦게 이 작품을 찾아 본 사람 중에는 계속되는 독백과 느릿느릿한 전개, 그리고 악명높은 마지막 편 기차 장면 덕분에 굉장히 불호를 말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마코토 감독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유지될 수 있는 거리에 굉장히 천착해 온 감독입니다. 그가 1인으로 모든 것을 맡아 연출하고 첫 번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별의 목소리>는 머나먼 우주로 떠난 여주인공과 지구에 남은 남주인공이 8광년이라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먼 거리를 휴대전화 메일이라는 아주 작은 수단으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게 하고, 첫 장편인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는 국경을 경계로 서로의 거리를 나누고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다만 둘 다 SF적 배경으로 주인공 인물들의 애틋한 감정과 사랑 그리고 만남과 헤어짐이 픽션이라는 일종의 안전장치를 확실하게 느끼게 하지만 <초속 5센티미터>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90년대 후반 일본의 평범한 동네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어서 주인공이 느끼는 첫사랑의 셀레임과 멀리 떨어져서 느끼는 상실감과 고독 그리고 재회하고자 하나 결국 할 수 없는 어떤 감정선을 제대로 건드립니다.
(스포일러 주의!)
특히 중학생이었던 주인공이 성장하여 20대 중반이 되었지만 결코 잊지 못하는 첫사랑의 그녀를 재회할 수도 있었던 기찻길 건널목, 그러나 기차는 멈추지 않고 계속 지나갔고, 서로의 발걸음은 맥없이 바뀌고, 그 발걸음을 따라 주인공이 아주 어렸을 때처럼 벚꽃잎이 휘날리며 땅바닥에 맞으며 이 영화의 주제가가 흘러나오다가 영화가 끝나버렸을 때 첫사랑의 아름을 간직한 이들에게는 픽션이 현실만큼 아니 현실보다 더욱 큰 상처를 되새기게 하는, 더 심한 말로 아주 후벼 파는 효과를 주기도 합니다.
감독은 후에 이 장면이 의도한 바는 괴롭히려고 만든 게 아니라 ‘인생,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법이니까 힘내라’라는 격려의 의미를 담은 작품이었는데 의도와는 다르게 전해진 것 같다고 많이 반성했다는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마지막 장면은 저한테 큰 감명이나 충격은 아니었고 오히려 1화에서 중학생 시절 주인공이 기차로 1시간 이상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간 첫사랑 그녀를 찾아가기 위해 편지로 약속 시각을 정하고 올라탄 기차가 당시 겨울이라 폭설 때문에 멈추게 됩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고 기차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아무리 직원에게 물어봤자 언제 움직일지 알 수 없다는 대답뿐, 그에게는 아직 휴대전화도 SNS도 없는 시절. 한겨울에 눈 속에서 그녀가 어떻게 기다리고 있을지, 아직 기다리고 있을지 전혀 알 수 없이 무력하게 기차 속에 갇혀 몇 시간을 보낸 그 인물의 감정에 굉장히 이입했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리고 그걸 더욱 극대화해주던 신카이 마코토 특유의 색감과 섬세한 빛의 효과와 연출도 말입니다.
참 신기합니다. 봄은 그냥 계절적 변화일 뿐이고, 벚꽃은 그 계절에 피고 지는 꽃일 뿐인데, 그리고 언제나 찾아왔다가 떠나가고, 그리고 다시 찾아오는 순환의 과정일 뿐인데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각각의 추억과 감정과 어떻게 보면 인생 전체에 영향을 주는 변화를 주기도 합니다.
내년 봄에도 결국 찾아 올 벚꽃은 마스크 없이 그리고 거리감 없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보며 떨어지는 모습 조차 웃으며 보낼 수 있기를 기원하며 주절주절 긴 글을 마칩니다.
꼬리글)
원래 여기에다 문화비평가이자 신화비평의 대가 노드롭 프라이가 설파했던 뮈토스 이론으로 봄의 뮈토스와 봄 콘텐츠을 연결해서 마무리해보고자 했는데 그건 완전 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