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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거리두기 기간 동안 이야기를 소비하는 방법

분류
운영멤버
기획PD
작성자
레미 Remy
#1
지난 1달간, 집과 회사 외에는 밖에 나가서 시간을 보내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두달 전 티비를 구매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마스크를 미리 사둔 것보다 티비를 산 제 자신이 기특하게 느껴진다고 하면 너무한 걸까요. 정부가 공식적으로 명명한 ‘사회적 거리두기’기간 동안 저는 ‘이태원 클라쓰’, ‘하이에나’를 섭렵했고 ‘슬기로운 의사생활’과 ‘부부의 세계’를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요즘 대세’에 대해 실시간 싱크를 맞춰 가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은 ‘피구왕 통키’와 ‘디즈니 만화동산’을 시청할 때 이후로 처음인 것 같습니다. 여전히 침대에 누워서 이 프로 저 프로를 돌리다 보면 ‘밥블레스유’, ‘나 혼자 산다’로 채널이 넘어가고, 다른 한 손은 옆에 둔 핸드폰을 만지며 배달앱을 켜곤 합니다. 그 결과 기름진 이야기들과 함께 실제 3킬로그램의 살덩이를 제 몸에 비축하게 되었습니다. 
#2
지난 금요일, 일하고 집으로 바로 돌아가는 것이 지겨워져서 영화관에 들렀습니다. 그 큰 영화관은 텅텅 비어 있었고, 저를 포함한 7명의 관객은 모두 흩어져 앉아 있었지만 옆 사람과 손을 꼭 잡은 채 보는 2쌍의 커플들이 눈에 거슬렸습니다. 서로 다른 자세로,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울며 본 영화의 제목은 ‘1917’입니다. 이 영화는 전쟁영화인데 두 명의 군인이 장군이 시킨 일을 달성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한 명이 죽고, 다른 한 명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이야기 입니다. 꽤 집중하며 보고 있었는데 같은 극장 안에 있는 그 커플들이 순간 왜 웃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기억할 만한 멋진 장면이 많았지만, 영화에 대한 집중은 적은 관객수로도 깨질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채 영화관을 나섰습니다. 극장을 들어갈 땐 케러멜 팝콘과 콜라 브리또가 손에 있었는데 나올 땐 양손이 비어 있어 좋았습니다. 늘 영화관에서는 물조차 마시지 않고 숨소리도 크게 안내고 경건한 마음으로 바둑기보 보듯 영화를 봤다면 이제 영화는 제게 예술이라기 보다는 엔터테인먼트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영화는 외로움의 산업에 속하는 콘텐츠라는 것도 깨달았구요.
#3
주 44시간 이상 만나는 안전가옥 운영멤버들은 좋아하는 이야기 취향이 제각각 입니다. 하지만 다수가 좋아하는 웹툰이 있었으니 바로 ‘유미의 세포들’ 입니다. 새 에피소드가 나왔다길래 가지고 있던 쿠키로 이야기를 사서 먼저 보고 다른 멤버들에게 아이패드를 넘겼습니다. 중학생 때 학교에 몰래 만화책을 가져가면 조용히 서로 돌려가며 읽었던 그런 순간들이 떠올랐습니다. 종이 만화책에서 아이패드로 바뀌었을 뿐. 새로 나온 에피소드에서는 유미가 함께 일하는 편집자를 좋아하기 시작하고 그 마음을 어떻게 전달하면 좋을지 고민합니다. 어떻게 해야 타오르는 내 마음을 전할 수 있을지 전전긍긍하던 내 모습이 떠올라 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어떤 때는 내가 유미가 좋아하는 편집자, 순록이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내 자신이 유미가 된 기분입니다. 세포들의 반응과 생각은 얼마나 많은 이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을까요? 웹툰의 조회수를 보면서 유미의 세포들을 이식받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역시 대세는 웹툰인걸까요?
#4
뭔가를 기다려야 하는 순간(은행 대기줄, 버스 도착 시간, 커피 주문)이 오면 휴대폰으로 뮤직비디오를 봤는데 이제는 카카오 페이지로 들어가서 웹소설 혹은 웹툰을 봅니다. 손가락 하나로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다 질리면 가장 편안한 자세로 책을 읽을 수 있는 장소를 찾아 책으로 봅니다. 이번 주말 내내 티비, 웹툰을 보는 것에 지쳐서 간만에 책을 집었는데 바로 하오징팡의 단편집 <고독 깊은 곳 > 이었습니다. 인구가 과밀해진 중국, 도시가 3등급으로 나뉘고 사는 이들도 3개의 계급으로 나뉜 상황에서 주인공은 높은 계급이 활동하는 시간과 장소로 이동할 수 없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어린 딸을 좋은 어린이집에 보내기 위해 다른 고객들이 요청한 물건들을 다른 계급에게 배달합니다. ‘접는 도시’라는 이 단편의 제목처럼 도시가 접히면서 3계급의 활동시기가 바뀌는 장면은 언젠가 우리의 미래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잠시 마음을 졸이기도 했습니다. 책을 읽은 시간이 드라마, 영화, 웹툰을 본 시간보다 짧았음에도 이 소설이 자꾸 떠오르는 건 왜 일까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장면을 떠올리게 해서 일까요?
책의 시대는 언제나 늘 지나갔다고 하지만 텔레비전, 라디오, 웹툰에서도 찾을 수 없는 새로운 이야기들은 주로 책 속에 숨어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졸릴 땐 페이지에 표시하고, 무한한 상상력으로 이야기의 배경을 그려볼 수 있다는 것. 결국 저는 내 손에서 이야기를 쥐락 펴락 할 수 있는 책으로 다시 돌아올 거 같아요. 작가가 아니라 독자가 언제든 이야기를 멈출 수 있고 창조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소설만한 것이 있을까요? 이야기에 대한 중독이 심해지고 있는 요즘, 과연 새로운 이야기는 어디에서 주로 태어나는지 궁금합니다. 열심히 보고, 찾고 있습니다. 알려주세요.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운영멤버 레미
"인스턴트 같은 이야기 말고 건강하고 맛있는 이야기를 천천히 음미하고 싶어요. - 이야기 중독자 레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