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도 모자라 이제 샴푸향으로까지 연금을 받게 됐다는 그 분의 노래들처럼. 산에 들에 피는 꽃만 보면, 코 끝을 스치는 봄바람이 불면 생각나는 바로 그 장면, 그 이야기.
2021년 3월 월간 안전가옥의 주제는 '봄에 생각나는 그 콘텐츠' 입니다.
옥상 난간에 열일곱에서 열여덟쯤으로 보이는 소년이 서 있습니다. 탁 트인 눈앞에는 반짝거리는 도시의 야경이 펼쳐져 있죠. 배경음으로 드뷔시의 <달빛>이 잔잔히 깔립니다. 소년은 허공의 어딘가를(아마도 당신을) 바라보며 미소 짓습니다. 그 애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그대로... ...떨어졌을까요?
소년에게는 친한 여섯 명의 친구들이 있습니다. 각자의 아픔을 지닌 친구들이죠. 가정폭력을 일삼는 아버지를 자신의 손으로 죽인 친구, 유원지에서 어머니에게 버려진 채 기면증을 앓게 된 친구, 어머니를 화재로 잃고 똑같이 불을 질러 자살 시도를 했던 친구,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 온갖 아르바이트를 뛰며 현실의 무게에 짓눌린 친구, 유년 시절 납치를 당했던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아 거짓말을 일삼는 친구, 그리고... 그들의 모든 아픈 과거를 타임루프로 돌이켜, 다시 행복한 삶으로 바로잡고자 하는 친구까지.
계절이 바뀌면 코끝에 감도는 특유의 내음이 있는 것 같아요.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바람 속의 멜랑콜리한 향을 맡으면, 저는 (인터내셔널팝케이센세이션선샤인레인보우트레디셔널트랜스퍼usb허브쉬림프킹갓제너럴월드와이드핸섬...) BTS의 세계관인 <화양연화> 이야기 속 일곱 소년이 떠오릅니다. 딱 재작년 이맘때쯤 이들의 이야기가 담긴 소설 <화양연화: 더노트 1>을 읽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거든요. 이 세계관의 해석에 대해서는 굉장히 다양한 의견들이 있지만, 저는 어슐러 르 귄의 단편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해석을 가장 좋아한답니다. 일곱 소년 중 한 명의 희생으로, 나머지 여섯 명이 완벽한 행복을 찾았다는 이야기요.
타임루프 능력을 가진 친구는 여섯 명의 시궁창 같은 과거와 트라우마를 아예 없었던 일로 만들어, 잘못된 일을 바로잡고 모두 행복해지기 위해 시간을 돌립니다. 세상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이 행동은 또 다른 비극을 부르죠. 결국 지속적으로 타임루프를 쓰다 지친 이 친구는 깨닫습니다. 한 명이 완벽히 불행해지면, 나머지 여섯은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에요. 희생양이 되는 소년은 바로 저 위, 옥상에 서 있던 그 아이입니다. 이 소년은 가장 막내이지만 곁에 있는 친구들이 너무 소중하기에 운명(?)을 받아들이고, 자기를 죽이기 직전인 타임루프 소년에게도 미소 짓죠. 형, 난 괜찮아요.
어슐러 르 귄의 단편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역시, 한 명의 희생으로 다수가 행복해질 수 있는 세계를 그리고 있는 작품입니다. '오멜라스'라는 왕도, 경찰도 필요없는 완벽한 행복이 보장되는 곳이 존재하고, 그 행복에는 단 하나의 계약 조건이 걸려있죠. 마을의 한 건물에는 어둡고 지저분한 지하실이 있습니다. 그 안에 갇혀 비참하게 사는 아이가 한 명 있어요. 그 애가 완벽히 불행해야만 오멜라스 라는 마을이 행복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거죠.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무슨 이야기일지 감이 오시죠? 작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그렇게 만들어진 행복이 과연 정당한 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BTS 역시 마찬가지로 소년 한 명의 희생으로 얻었던 자신들의 행복이 ‘가짜 행복’, ‘가짜 사랑’이었다는 <FAKE LOVE>를 타이틀 곡으로 불렀고요.
초반에 한 명의 등을 밑에서 받쳐주는 안무가 '희생한 소년에 대한 속죄'라는 이야기도...!
‘화양연화’라는 세계관 스토리텔링을 통해 앨범의 타이틀 곡까지 이야기가 이어지는 일련의 형식이 전 정말 좋았어요. 기꺼이 모두를 위해 희생을 택한 소년이 청량한 목소리로 부르던 노래 <Euphoria (유포리아)>는 세계관을 알고 들으면 아름답기도 하지만, 조금 무섭게 느껴지기도 하죠. 이 잔인한 시절을 보내는 소년들의 이야기는 아이러니하게도 화사한 봄날과 딱 어울립니다. 만물이 피어나는데 나 혼자 피지 못하는 그 아픔은, 봄에만 느낄 수 있는 섬뜩한 청춘의 감성이니까요. 하지만 그런 시기조차 함께였기에 아름답다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이처럼 혼자 또는 서로 꽃을 피우지 못한 소년들이 애틋하게 모여 써내려 간 이야기라서 <화양연화> 세계관은 제겐 아주 오래도록, 봄이 오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콘텐츠일 거예요.
그리고 이것은 사족이지만... 몇 달 전에 BTS의 노래인 <Butterfly>의 노래 가사에 맞춰, 화양연화 속 소년들의 이야기가 동화로 재탄생한 그래픽 리릭 책을 샀어요. #mood를 위해 음악과 함께 감상하며 가사 한 소절 한 소절, 음미하며 책장을 넘기고 자신들의 아름다웠던 화양연화의 시절이 깨질까 겁난다는 듯한 가사와 그림을 보는데... 제 유년 시절 생각도 나서 울컥하더라고요. 누군가는 고작 아이돌 세계관 이야기냐며 혀를 차겠지만, 이토록 많은 사람을 과몰입하게 만드는 스토리텔링을 아이돌 IP와 접목 시킨 부분은 기념할만한 일인 것 같아요. 앞으로는 아이돌 세계관이 좀 더 빅 IP로 작동해서 영화, 드라마, 웹툰, 소설 등 많은 분야를 통해 그들의 AU 스토리를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요?(물론 좋은 작가와 스토리텔링 개발 시스템이 필요하겠죠? 안전가옥 같은) 이런 세계관 스토리텔링이 전문적, 본격적으로 등장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기에 드러나는 문제도 많지만(불행하고 잔인한 픽션에 멤버들의 실명이 거론되는 일 등), 개인적으로 이야기가 점점 장르의 경계를 지워버리는 현장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것 같아 짜릿하네요. 앞으로는 또 어떤 그룹에서 어떤 신박한 세계관 이야기가 나올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글을 마치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유포리아를 엔딩 크레딧 BGM으로... )
월간 안전가옥 한 달에 한 번,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 달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운영멤버 쏘냐
"<화양연화> 세계관 같은 메리배드엔딩 이야기는 정말 매력적이에요. 일본에선 이걸 ‘메리바’ 라고 한대요. (TMI...)"